소소방담小笑放談

노트르담의 장미

월드인기스타 지성인 세린 2019. 4. 22. 13:06

                          노트르담의 장미

 

노트르담이 불타고 있다.

 

막 잠이 깨어 조금 몽롱한 상태에서 마주친 저 글구, 영화 제목이거나 자극적인 유트브 제목이거나...아득한데,,,클릭하니, 그것은 사실이고, 뉴스이고 사건이고 그것도 진행 중인 형이상학이었다. 초현실적이었다. 달리의 아득한 그림 형상들이 얼핏 스쳐가며...이런 초현실적인 뉴스를 근래 몇 번 경험했던 것 같기도 했다. 파리의 노트르담은 실제로 화염과 연기 속에서 불타고 있었는데, ‘불난 이웃집인 듯 세계인들은 목을 내밀어 불구경하는 모양새. 아주 안타까운 심경으로.

 

노트르담은 Nôtre 우리의, Dame 여자, Our Lady, 성모 마리아를 뜻한단다.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 숙녀 our lady가 불타고 있다'라며 안타까울 때, 실은 '우리의 성모마리아'가 화상을 당하고 계시다는 뜻. 그런데 저 다메Dame’는 독일어로 숙녀를 뜻한다, 여태 몰랐었지만, 프랑스 사람들과 독일인들은 Dame를 같은 뜻으로서 발음만 달리 사용하고 있었던 거다.

 

노트르담은 나에게는 문학과 영화와 회화와 혁명으로 다가온다. ‘빅토르 위고덕분, 그의 소설이 영화화되어 히트치고, 혁명의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순정한 사랑. 종지기 꽈지모도 Quasimodo’가 짝사랑하던 에스메랄다를 화염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구하여 안고 구출시키는 긴박한 장면,,, 꼽추 종치기가 주인공인 이 노트르담 소설의 낭만성은 자연스레 몽마르트르와 연결되어 장애 화가 로트렉을 상기시키며 까마득히 잊고 있던 프랑스 문학과 가난한 불우한 화가들을 떠올리게 했다. 노트르담 성당의 종소리는 현대의 음악에서 살피자면 파 올림이라고 한다, 17세기에 그 종을 다시 주조할 때에 파리의 귀부인들이 보석과 은을 던져 넣어서 맑고 깨끗한 음색이라는 소문이 있다.

                                            Image result for 노트르담 대성당 장미창

 노트르담 대성당의 압도적이고도 장엄한 외관은 '돌의 거대한 교향악'이라며 고딕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꼽히며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번에 화재 소식이 나자, 다시 그 칭송들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유적도, 한 조각의 유리도 아니다. 그것은 총체다. 그것은 파리의 영혼이며, 모든 것을 조화롭게 결합했다. 노트르담은 영원한 파리의 배경, 노트르담에게서 문명이 뭔지 알게 되었다. 노트르담은 세상엔 대체 불가한 값진 것이 있으며, 인류는 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필자 역시 이 대성당의 외관인 아치형 3개의 문들과 3개의 거대한 원형 창과 우아한 조각들이 박힌 그 아름다운 자태에 감동하고 찬탄했다. 특히 둥근 창문은 우리들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딱딱한 돌들을 마치 한 줌 가는 실을 가지고 뜨게질한 복잡한 레이스 형태로 창조해 낸 석공들 아니 석예술가들의 神技의 기량은, 불란스인들이 지상최고의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人들이었음을 증거한다. 나는 머나먼 외국에서. 화면으로만 불타는 노트르담을 보면서. 섬세한 돌 세공과 웅장한 위압적인 석조 건물로서의 노트르담에 한없이 감탄했던 것이다. 나의 찬사는 프랑스라는 나라에, 석공들에게, 대성당 건축을 위한 물적 기술적 재정적 환경과 당대의 상황을 종합하며 마침내 하나의 예술 건축물을 완성해 낸 모든 관련자들에게로 향했다.

 

첨탑과 지붕에 800년 이상 된 참나무 (목재여서 이번 화재에 제일 먼저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를 사용했어도 노트르담 대성당은 기본적으로 석조건물이다. 돌이 주는 질료의 차거움과 딱딱함의 질감, 돌의 무게감은 석조 건축인 노트르담 대성당을 한편으로 종교적인 위엄과 위용을 뽐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성당의 돌에 새긴 섬세한 조각들은 기교적 정교함의 극치로서 보는 이들을 황홀케 한다. 대성당 석조의 수수한 희끄므레한 색조조차, 그 거대한 노트르담이 마치 생명있는 유기질돌로서 이루어진 의 제작물인냥 본래의 돌의 무기질 본성마저 잊게 한다

 

그런데 그 연기 자욱한 화염 속에서 하나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장미 창말이다. 외부에서도 눈에 잘 띄는 그 거대한 원환의 이름이 '장미창rose windows'란다.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장미창'이란 그 명칭이 나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들렸고, ‘역시 프랑스 사람들 답다이 들더라는...다행스럽게도 3개의 장미창이 완전 소실되지는 않았고 특히 처음부터 불붙어 무너진 첨탑 곁에 북쪽 장미창이 살아남은 건 기적이란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입구인 서쪽, 남쪽, 북쪽으로 3개의 대형 장미창이 자리한다. 1260년 만들어진 남쪽 창은 직경이 13m에 달하며 84개의 유리 패널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시는 큰 창문 유리가 없었기 때문에 조각 유리를 붙여서 대형 창문으로 삼았다는 것. 그 결과 이 고딕 성당은 이전의 성당에 비하여 내부가 더 밝아졌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장미창들은 구약과 신약성서의 12사도, 그리스도의 부활 등 종교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미창은 800년 넘는 생존답게 프랑스 역사와 영욕을 함께 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지나, 18307월 혁명당시엔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1860년께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현재의 창에 중세와 19세기의 유리가 섞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훼손을 우려해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을  떼내어 安家에 모셔두었다가 종전 후에 다시 설치되는 보물다운 특급보호를 누렸다.

 

소리가 공명이 가장 잘 되도록 지어진 이 고딕 건축의 내부에 , , , 녹색을 주조로 삼아 종교적이며 환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테인드 글라스장미창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창문의 둥금 그 형상이 장미꽃 모양 같기도 하지만, 신자들이 숭모하는 성모 마리아에게 꽃의 여왕 장미의 이름을 경건하게 헌사하고 싶었기도 했고, 장미가 지혜의 꽃이며 거룩한 성모의 상징이기 때문이란다. (오늘날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희미한 인공 광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에는, 장미창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그 자체로 신비함이고 숭고함이자 엄숙한 종교 예식의 중요한 동반자였다.

 

내게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것은 일상이었다. 나는 베를린에서 매주 몇 번꼴로 지나다니며 쿠담의 황제기념교회에서 새어나오는 푸른빛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늘 감탄했었다. 성도가 아니기에 교회 내부를 들러 살피진 않았다. 이번에도 나는 불난 노트르담의 겉면에만 주의했다가 그것이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줄을 미처 잊고 있었던 거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렇고, 실제로도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 원형 돌창은 실은 내부에 형언키 어려운 둥근 부드러운 꽃잎들로 수놓아진 장미창이라니. 그 무겁고도 육중한 석조건물인 노트르담은 이방인인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보물을 안으로 숨기고 있었으니, 그것이 장미창이다.

 

노트르담의 장미창은 경이다, 그 존재로서 능히 혼탁한 세상을 '맑힌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장미무늬의 창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종교성의 장엄함과 위엄의 겉모습을 보고 느낄 수는 있으되, 성당 내부로 들어오지 않는 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 그지없이 딱딱한 돌덩이 껍질에 싸인, 그러나 샘물같은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경건함과 신비로움을 표현하는 진정한 내적 본성, 평범한 사람의 혀로는 형언할 길 없는 고요한 엄숙함, 서늘하면서도 미묘한 따뜻하게 체감되는 스러움의 진수. 현란한 첨단 기기를 사용하는 교만한 현대인이, 800년 전에 이루어진 지난한 수공의 현전 앞에서 속절없이 위축되도록 이끄는 성소를 마련하여 간직하고 있는 장미창. 그러므로 파리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장미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은 그대로 신의 영묘함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절로 겸허해지며 굳이 경건해지는 그 분위기를 장미창이 자아내고 있을 것이다.

 

노트르담의 장미창은-문외한은 외부와 내부의 이면을 결코 상상하지 못하는,-자신만의 미의 본체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노트르담의 장미창의 미란 그저 소박 단순함(한국 문화재의 특징)이 아닌, 섬세와 화려와 찬란의 최고도의 기법이 과학과의 정교한 비율로 조합할 때만이 현현될 수 있는, 내부의 아우라의 영원성을 간직하고 있다.

 

미는 경제와 지성에 기반하여 생성되고 성장, 산출된다. 미는 생산자(예술가)가 후원자(경제)를 얻지 못하면 발현되기 쉽지 않다. 미의 불모지도 있다, 그 곳에 사람들은 미를 아예 모르거나, 볼 줄 모르고, 볼 여유가 없고, 미를 향유할 처지가 못되거나, 역사적으로 미의 경험이 없거나, 인식적으로 미를 알지 못하거나, 미의 감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의 수준이 따라주지 않는 곳이다, 그런 척박한 땅에서는 생존을 구하려던 미도 곧장 비존재로서 소멸한다. 미의 생존과 번성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한국인들이 미를 의식하고’ ‘보기위해서는, 차후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

 

 

파리에서 서구에서 그 존재로서 시간을 초월하여 예찬되는 장미의 미는, 그것을 알아볼 줄 아는 지성 덕분이다. 미는 돼지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돼지들에게 다이애나의 진주 목걸이를 던져보라, 자신들의 똥을 묻혀 뒷발을 들어 진주를 돼지똥 시궁창으로 떠내려 보내 없애 버릴 것이다. 돼지들에게 진주는 돼지들이 마셔야 할 한 사발의 구정물보다도 못한 것이니

 

지저분한 10류들이 설치는 쓰레기들 무리들에게는 장미의 이름은 돼지의 진주로 전락하여 똥물이 된다. 장미는 쓰레기 통에서는 오직 부정적으로만 사용된다. 그들은 환상illusion으로 표기해도 충분히 그 맥락이 이해될텐데, 굳이 장미빛 환상으로서 기표하여, 장미의 싱싱한 한 때의 붉음조차도 부정적으로만 부각시키는 기호주의자들이 된다. ‘장미빛 환상은 심술보 쓰레기들의 애칭 관용어이다. 쓰레기들이기에 어여쁜 장미롤 볼 수 없다. 대신 미를 공격 일삼는 따발총 가시꽃, 찔레꽃으로 변질시켜, 전파한다. 미란 오직 특권적으로 머나먼 유럽에만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 추녀들은 장미꽃에 원한을 품는다, 이들은 대미對美 조현병 환자들이다. 미의 피해 망상증을 보인다. 장미만의 도도한 타고난 아름다움에 스스로 절로 기죽어, 그리하여 추레한 자신들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어여쁜 장미꽃이 추악들에게는 얄밉고 불편하니 싫다. 추녀들이 수백년 애써 일구고 가꾸어 놓은 추녀 이데올로기추녀는 착하다추녀 주제에 나쁜 짓을 더 많이 한다는 진실을 일깨워 주는 장미꽃. 추녀 '글자 배열 장사꾼(자칭 文人)들은 그러므로 장미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차마못한다, 되려 장미 너 가시꽃이라며 내면의 시기 질투를 억누른다. 아무튼 한추韓醜들이 어떻게 부르든, 장미의 본질은 미의 현현이고, 그 미는 오묘하여, 대개의 인간은 언어화할 능력이 별로 없다. 위대한 릴케 정도? 그 도달할 수도 없고, 어루만질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품을 수도 없으나, 예찬은 진정하다, ‘장미, 너 모순이여!’, 진리를 터뜨리며, 부르짖는 수 밖에.

 

한국에서 장미를 날조하고 공격하고 부정적인 수사로만 사용하는 것은 상술한 이유도 있겠고, 또한 기호주의자의 진흙탕 심뽀 때문이기도 하다. 쓰레기들의 넘치는 심술 말이다. 이들은 사람의 기본인 심성을 잃었다. 심술은 악보다 덜하고 나쁨과 못됨의 사이에 위치하지만, ‘악행의 이행의 교두보 자리여서, 그것은 자주 ·中 惡行을 거리낌 없이 행하니 위험하다. 심술들이이 매스컴 흉기를 차지할 때, 심술은 사회 부패와 악의 1등을 치지한다.

 

이 나라에는 각종 쓰레기들이 넘친다. 쓰레기 3종 세트. 기자 쓰레기들, 인문철악심리사 쓰레기들, 그리고 플라스틱 쓰레기들이다. 저 중에서 두 개는 이미 한국 시민들이 발견했고, 인문철악심리사 쓰레기들은 김세린이 최초 발견자이다. 환경 의식없는 한국이 아직도플라스틱 쓰레기량이 단연 세계 1등 임은 세상 야만의 1등이라는 방증, 한편 기자 쓰레기들은 한국 대중들이 붙혀준 세상 유일 수치스런 집단 별명’ (부끄러운 줄도 모르더라), 여기서 오늘 더 말하지 않겠다. 김세린이 말하는 인문심리 쓰레기들도 널려 있다.

 

최근년 서씨 살인자 몰고가기사건을 보면, 세칭 실력있다고 알려져, TV 방송에 출연한 ‘韓 최고 1등 심리사들은 서씨의 평범한 무심zh 짓는 눈짓, 손짓, 표정들을 모두, ‘패륜 살인범의 그것으로 살인적진단을 했다. 그 실력 심리사들은 매스컴 흉기와 쓰레기들과 합심하여, 한 개인을 살인마 여인으로 몰고 갔다. 세간의 표현대로 말하면, ‘생사람 잡았다’, ‘마녀사냥질을 했던 것, 이들 새 양복 걸친 나으리 심리사들은 (그 유명한 하버드 심리학 박사들인지도 모른다) 유식하게도 별별 심리학적 용어를 남발하며 멀쩡한 개인들에게 심리작 병증을 적용시킨다. 일찍이 칼 포퍼가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을 비과학적이라며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비야냥거렸는데, 그것이 저 서씨 사건을 통해서, 21세기 개명 천지 한국사회에서, 심리학의 이현령 비현령사례, 내 두 눈으로 보았다.

 

심리사 쓰레기들과 철악자의 오류는 위험하다. 작년인가 근년에, 어떤 박사 교수 심리사가, 희로애락의 감정과 정념을 지닌, 인간 성격의 다양한 측면을 외면하거나 모르고서, 경쟁적인 사회생활 중,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심리적 고단함을 하소연하러 온 환자에게, 그 모든 어려움이 바로 당신의 성격 탓이다고 진단, 힐난하여, 그 심약한 연예인 환자를 자살로 내몰았다. 65세 동정녀 처녀 철악자가 평범한 사람들이 한번 내보이면, ’성격 장애자라는 둥 반복 엉터리 진단을 근엄하게도내리며, 쳠단 매스컴, 매체 흉기를 통하여 살포하였는데, 그 교수 심리사는 아마도 65세 동정녀 철악자의 엉터리 주장에 깊이 공감능력을 발휘하여, 한 연예인을 자살로 내모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연약하여,미 명문대(?) ’박사 학위증심리사들과 인문자들의 무식하고 악랄한 진단에 희생을 치르고 있다. (필자가 모르는) 지나간 수십년 동안 엉터리 다독가들이매스컴 종사자들과 더불어 수많은 자살을 유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사회의 인문철악심리사들의 상술한 악행과 위선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하물며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김세린 말고는...야만이 판치는 사회. 그 주체들이 위의 3종 쓰레기 집단들이다.

 

강조하자면 지난 수년동안 쓰레기들의 광견병적 악행은 도저했다. 이들은 사회의 어지러운 광란의 축이다. 오죽했으면 한 시민들이 쓰레기라는 별명을 선물했을까. 김세린을 향해서도, 인문철악자들과 심리사들, 기자 쓰레기들이 합심. 광란 공격하며 거짓말을 일삼았는지 스스로 돌아 볼 일이다 (성찰조차 아예 없을 거다). 평소 자신들이 불행하고 추레하니, 다른 누구라도 함께불행과 추레의 도가니로 끌고 가는 물귀신 작전의 살인적 심술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21세기 백주에, 깊이 병들고 삐뚤어진 갈라파고스섬의 살인적인 왕따 공격 광란의 발푸르기스의 밤에 벌어지는 광경을 목도했다면, 두말없이 그는 그의 철학 사상 <국가>의 제10을 끄집어 내어, 인문자(시인들)을 추방하라고 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들 엉터리 말 협잡꾼, 소피스트들의 毒性을 알고서 2500년 전에 이미 경고한 것. 플라톤에 따르면, 인문자(시인들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이성의 법칙을 어지럽힌다. 그들은 뮤즈신에 사로잡혀 광란 상태에서 말을 한다. 플라톤은 이렇듯 제 정신이 아닌 자들은 모두 공화국에서 추방시키라고 한다.

 

소피스트들은 사람의 심성이 없다. 사회적 편견을 형성하고 번성시키며, 마녀사냥을 즐기는 그들은 쓰레기들이다. 광견병 무리들이다, 고학력 대중들조차. 쓰레기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어리석은 군중 집단이다. 세칭 학력 드높은 한갈라파고스만의 현상이다. 쓰레기 소피스트들은 식자됨고급함’이 기대될 수 없다. 사람됨의 심성, 심술만 탱탱한 심술보를 차고 잘먹고 잘 살아간다. 저 심술 DNA5000년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았고, 경쟁과 비교 위주의 한국의 교육 현실과, 학벌 사회문화는 저들을 거대 심술보집단들로 살지게 키웠다. 그 심술은 다독多讀으로도 못 고칠 뿐만 아이라, 오히려 다독으로 확장된 온갖 부정적 형용사들의 남발을 일삼아 1등 심통으로서 활약한다. 집단 사회악이다.

 

아름다운 장미는 제 존재의 토포스를 만나야 한다. 이는 오직 장미의 행운과 복에 달렸다. 파리의 장미는 복 받았다. 노트르담의 장미창도 행운아이다. 고귀한 제 이름을 불러주는, 불러 줄 줄 아는 멋쟁이들에 둘러싸인 파리의 노트르담의 장미는 행복하다. 그에 비해 한 장미들은 고귀한 존재의 토포스의 행운을 받지 못했다. ‘장미를 알아볼 눈도 없고, 접대할 푸근한 '마음 넓이'도 없고, 5000년 동안 미의 고귀함의 경험의 역사가 없고, 오직 궁핍과 싸움에만 몰두해 온 후손답게. 장미의 미를 난폭하게 공격한다. 장미의 이름조차 바르게 호명하지 못한다. 그 가시 탱자 심술로는...

 

노트르담은 지구인 70억을 아무도 외롭지 않게 했다. 동시대 70억 세계인인 우리 다정한 지구인은 모두 하나가 되어 걱정했다. 동시대 친구 지구인으로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안타까워 했단 말이다. 인권도 아닌 사람도 아닌 미권美權(예술) 의식을 70억 지구인과 함께, 동시에느끼노라니, 5대양 6대주 70억 세계인이 마침내 일심동체을 만끽했다. 기술 발전이 현대인에게 선사한 시대의 따뜻한 선물. 70억 동시대인들은 덜 외롭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은 피지 않는다, 악취와 구더기만 번성할 뿐. 파리의 장미창 사진이라도 시청사에 걸어 두어 누구라도 자주 보게 해야 한다, 한국인들 萬人이 만심萬心의 씨앗이 깃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