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린 칼럼

1806년 가을 예나: 헤겔과 황제의 조우-역사의 종언, 그리고....

월드인기스타 지성인 세린 2024. 1. 16. 16:08

★필자가 2022년 여름 늦은 오후에 바이마르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올 적에 무언가 아쉬워서 자꾸고개를 돌린건, 지척에 예나를 두고서 그곳에 들르지 않았던 이유 때문. 근데 왜? 예나일까, 거기서는 이상주의 실러가 역사학 교수로 재직했기에 그 이름이 친숙한 대학이라 한 번 들러서 대학 교정내를 거닐어 보고 둘러 보고 싶었던 것. 돌아와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서 실러보다 더 명망한 학자가 근무했었고, 학문적 깨달음을 얻었던 대학이기도 하였다. 바로 헤겔인데, 1806년 포성이 울리던 예나에서 나폴레옹 황제를 조우했고, 그 순간 헤겔은 그의 철학적 명제를 발화發話하였다, "말을 탄 세계 정신Weltgeist zu Pferde"이라고. 이외에도 ‘절대정신’, ‘이성의 간지’, ‘역사의 종말’,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등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의 탄생지였던 대학이었다. 아래 짧은 에세이는 예나라는 역사적 장소에서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세계사와 인류 지성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철학자와 황제라는 두 인물의 만남에 대한 삽화이다. 필자는 추상과 실체가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는 그 조우의 외투의 끝자락 한가닥을 슬쩍 스쳐보려 할 뿐이다.

 

1806년 가을 예나: 헤겔과 황제의 조우-역사의 종언, 그리고....

 

1806 10, 36살 청년 헤겔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를 (위의 삽화와는 다르게) 2(한국의 3) 창문을 통해 목격하게 된다, 그는 그날밤 친구 니이트함머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정찰을 위해서 말을 타고 도시를 지나가는 황제를-이 세계혼Weltseele을 보았다. 그러한 개인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느낌이야. 그 개인은 마상에 앉아서 한 곳을 집중하며 세계를 장악하고 그것을 지배한다…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사태의 진전은 오로지 이 비상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지, 그런 사람에 대해 놀라워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 (김세린 번역) .” 다음 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과 작센군에게 극심한 패배를 안기면서 구 프로이센의 몰락을 부르던 그 무렵, 헤겔은 후에 그의 주저主著가 되는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의 마지막 장을 탈고하여 원고를 밤베르크로 보낸 참이었다.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an Friedrich Immanuel Niethammer,
Jena, 13. Oktober 1806: 

 

·                     "Den Kaiser – diese Weltseele – sah ich durch die Stadt zum Rekognoscieren hinausreiten. – Es ist in der That eine wunderbare Empfindung, ein solches Individuum zu sehen, das hier auf einen Punkt concentrirt, auf einem Pferde sitzend, über die Welt übergreift und sie beherrscht."..von Donnerstag bis Montag sind solche Fortschritte nur diesem außerordentlichen Manne möglich, den es nicht möglich ist, nicht zu bewundern." (Link)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개념 수정이 셍긴다, 세계영혼"Weltseele"에서 세계정신 "Weltgeist" 으로. 헤겔이 니이트함머에게 보낸 그 편지는 헤겔의 자서전 저자인 로젠크란츠가 1844년 처음으로 공개했으며, 15년 후 1859년 그 책은 "마상馬上의 세계정신"Weltgeist zu Pferde"이라는 그 유명한 공식 Die Formel’이 헤겔의 입을 통해서 발설되었다고 처음으로 전한다. Der Brief Hegels an Niethammer wurde von seinem Biographen Karl Rosenkranz im Jahr 1844 erstmals veröffentlicht und 15 Jahre danach, im Jahr 1859, wurde die Formel "Weltgeist zu Pferde" das erste Mal Hegel in den Mund gelegt(Jenaische Blätter, Jena: 1859, S. 17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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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정신 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에서 자신이 1806년 니이트함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썼던 "세계혼 Weltseele" 대신 세계정신"Weltgeist"이란 개념으로 전환시켜 자신의 철학논지를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혼"은 셀링이 1800년경 활성화 시킨 "플라톤의 개념 der platonische Begriff "Weltseele"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철학자 헤겔이 나폴레옹에게서 본 것은 편지에서 표현한 것처럼 "세계혼Weltseele"이 라기 보다 "인격화된 세계 정신"으로 통찰했다는 뜻이다.

Hätte der Philosoph Hegel in Napoleon den personifizierten Weltgeist gesehen, hätte er ihn so bezeichnet. https://falschzitate.blogspot.com/2019/12/napoleon-der-weltgeist-zu-pferde-georg.html

 

헤겔이 황제를 조우한 다음날 180610 14일 아침에 벌어진 예나 전투Battle of Jena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는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수적으로 월등했으나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본토까지 일거에 달려 10 25일에는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빌헬름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달아나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10만 명의 병력을 지원해 나폴레옹에게 대항했지만 역시 패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황제 나폴레옹의 거침없는 승리였다.

 

이 예나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압도적 승리에 대해 청년 헤겔은 프로이센의 몰락에 한탄하여 시일야 방성대곡하며 주저 앉지 않았다. 오히려 환희에 차서 역사는 끝났다-헤겔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코제브에 따르면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선언했다.

 

후에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헤겔이적장인나폴레옹의 점령 예나를 시찰하는 마상馬上의 세계 정신이라며 경탄한 것을 두고 철학자의 승자에 대한감정이입Einfühlung이며, 헤겔은 승리자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역사주의적 단이라 지적한다. 헤겔이 이웃국가의 나폴레옹 정복자를 열광하며 감탄한 태도는 후세의 호사가들의 인구人口에 자주 회자된다..

 

헤겔은 세계사를 절대정신(이성)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변증법적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역사를 이끄는 본질은 이성이고, 역사는 이 이성이 현실로 되는 과정이다. 이성은 간교한 지혜 List der Vernunft를 부리며 역사의 진보를 이루려 개인을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그 개인이 나폴레옹이고, 황제 나폴레옹은 헤겔의 절대정신을 체화하고, 프랑스 혁명 정신인 자유,평등 박애를 체화하여 앙시엥 제도를 파괴하여 새로운 근대적 정치질서를 형성한다

 

이성의 간지는 역사의 진보인 자유의 진보를 이루어, 이성이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르러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에 이르면 역사의 종말 부를 있는데,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나폴레옹은 外化한 자유이고 절대정신으로서 최종의 목적을 향해 달려온 세계 역사로서,이제  황제가 봉건 유럽에 자유의 제도화를 형성할 것이니, 역사가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판단하여 1806, 헤겔은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하여 당대와 후대의 지식인들이 모두 한마디씩 표현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게오르그 루카치는 그의 〈역사소설론 Lukács, Georg (1962), The Historical Novel, Trans. Hannah and Stanley Mitchell. Harmondsworth: Penguin〉에서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당대 다수 대중이 역사를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경험으로서 집단적으로 체험하였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주로 용병이 전쟁을 수행하고, 평범한 대중은 역사적 격변이 자신의 삶과 무관한 구경거리였는데,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대중들은 이제 국민군으로 조직되어 역사적 사건을 대중 자신의 직접 체험이 되는 변화가 일어났음에, 이것이 근대적인 역사의식의 탄생이며, 근대 민족과 민족주의의 형성을 가져온 새로운 역사적 경험으로서 평가하였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식자들도 프랑스 대혁명을 나폴레옹과 공화주의와 자유와 연관시킨다, 192155일 조선의 모 신문은 오인吾人은 본년 55, 감개무량의 눈물로 자유의 신()을 조문하고 공화의 신()을 찬미하였는데, 그 자유의 신이며 공화의 신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을 일컫는다.  

헤겔도 프랑스 대혁명의 열렬한 신봉자이다. 헤겔은 그의 나이 50살이 되었을 때, 자신은 프랑스 대혁명을 처음부터 "두려움과 희망Furchten und Hoffen"으로 맞았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헤겔은 사망 전까지 프랑스 대혁명 지지자였고, 나폴레옹의 숭배자 였다. 그의 생전에도 그러했고, 그가 실긱하여 모든 권력을 잃었을 때도 한결같았다.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 프랑스 혁명을 맞이한 헤겔은 프랑스 혁명을 “인류 사상사에서 빛나는 일출„Morgenröthe des verjüngten Geistes 으로 표현하였다. 'verjüngten Geistes'가 사전적으로는 새로운 정신의 여명?’-미신과 미몽을 깨어난 '계몽적 밝은 정신의 여명의 빛나는 일출'이라며모든 생각하는 존재가 이 시대의 환희에 동참했다.”고 했다. 영국시인 워즈워스는 에드먼드 버크와는 다르게 혁명은 축복이고 자신의 젊음은 더 축복이라는 詩를 썼다. 그 대혁명 2년 후 1791년에는 튀빙겐 신학교에서 친구들과 자유의 나무를 심으며 혁명가를 불렀던 자유주의자 청년 헤겔은 널리 알려져 있다.   

 

1814 4월 파리가 함락되고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되었을 때도 그리고 그 세계사적 개인1821년 사망 소식에도, 헤겔은 권세의 종말이니 뭐니 하며 그를 비웃지도 배신하지도 않았다. "어마어마한 천재enormes Genie" 상실이라며 말했고, 헤겔 연구자에 의하면 헤겔은 나폴레옹의 사망일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헤겔이 1831년 괴테보다 1년 앞서 당시 펜데믹이던 콜레라로 사망할 떄까지, 매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일'에는 포도주 기울이며 프랑스 혁명을 자축했다고 한다.

 

20세기에 E. H. Carr 카는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인간의 정치적 행위의 목적이 되었고, 역사에서 미래 지향적인 진보 사관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한다(Carr 1966). 자유와 역사의 진보인 E. H. 카의 프랑스 대혁명이란 헤겔이 1806년 나폴레옹에게서 보았던 자유의 이념이었고, 진보의 종착점이었으니, 헤겔은 19세기 초두에 역사의 종말을 예견한 것이다

 

1806년에 헤겔의 역사는 끝났고’, 1989년에도 역사의 종언이 울려 퍼졌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을 보고서 필자는 "지정학의 귀환"이라 기명했고, 20222월 푸틴의 우크라이나 공격에서 보다 명백해진 역사의 귀환을 보았기에, ‘역사의 미네르바는 날개를 펼친다라는 글귀로 서술했다, 2024 1월 현재 작년 10월에 터진 하마스 테러단의 이스라엘 국가 공격을 시작으로 중동과 여타 지역의 무력 충돌의 기운 비등현상등등에 더해서 분쟁에서 사용되는 최첨단 무기들이나 정책 결정자들의 무시무시한 언변 교환은 핵무기급이다. 역사의 미네르바는 정말로 날개를 펼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