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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린 문학세계

아는가 그대는, 레몬꽃 피는 저 남쪽 나라를

월드인기스타 지성인 세린 2023. 8. 6. 06:39

*아는가 그대는, 레몬꽃 피는 저 남쪽 나라를

 50대 장년의 남자는 자신보다 정확히 10년이나 더 젊은 ‘친구’의 관 앞에서 그가 지은 시 "종의 노래"를 추도사로 낭송하며 중간에 흐느끼기도 하였다.

 

1805년 5월 9일. 가버린 그 친구와 불과 일주일 전 5월 1일, 그는 문득 그와 대화하고 싶어. 몇분이면 도착 할 수 있는 친구 집으로 만나러 갔을 때, 친구는 부부동반하여 마침 연극 보러 외출하려던 참이라 며칠 후 만남을 기약하며 집 앞에서 아쉽게 헤어졌었다.

 

저 ‘가버린 친구’는 실러이고, 살아서 ‘우는 친구’는 괴테이다. 그는 25살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써서 서구에 베스트셀러 유명 인기 작가가 되었지만, 괴테보다 더 젊은 23살에 실러는 최초 희곡 〈군도 Die Räuber〉(1782년 만하임에서 초연)을 상연, 히트시키며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을 포함 독자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이후 유명 극작가였다. 괴테는 후에 친구 실러의 상실을 두고서 ‘내 존재의 절반을 잃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보다 더 절절한 애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지금 살펴 보면 괴테의 실러 상실감은 ‘표현 이상’일 것으로 짐작 된다, 실러의 죽음을 두고 괴테는 그가 타계할 때까지 지속해서 실러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가버린 그 친구를 그리워했으니까.

200년이 지난 지금 김세린도 ‘흐느끼는 남자’의 이 대목에서 ‘우는 괴테’ 그 우정의 현장이 ‘사실寫實적으로’ 그려지면서, 그날의 괴테의 슬픔에 감응하며 울컥하더라는… 세린에게 괴테와 쉴러두 남자의 ‘우정은 과장된 일면이 있을 것으로 막연히 짐작했었다. 둘다 당대의 명사였고,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즉 그들의 말이나 글들은 유럽의 호사 거리였으니...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문헌들을 조사해 보니 그 두 거장의 마음이 ‘쇼윈도우 우정’이 아니었다는…진실이었음을 새삼 파악했다는…  

 

그해 56살인 괴테도 이미 4년여 중환에 시달려, 몇 번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이제 겨우 병세가 호전되던 무렵, 그리하여 지난 3월 초. 실러가 괴테를 방문하여 둘은 아무 말없이 오랫동안 볼을 부비며 서로를 반가워하였었던…

 

그러던 젊은 실러가 1주일만에 절명하였을 때,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허약한 괴테의 상심을 염려하여 실러의 사망 소식을 곧바로 전하지 못헀는데, 괴테가 눈치를 채고, 며칠간을 침울하였었고, "나는 내가 먼저 죽을 줄로 생각했지,,,그런데 친구를 잃었어…‘내 육신의 절반을 잃은 것’이라고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실러의 詩 "종의 노래 Das Lied von der Glocke」1799"는 무척 긴 역사시이다. 괴테가 어느 부분을 낭송하였던 걸까, 아래에 눈에 띄는 시구가 있었는 바, 아마도 추도사 내용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끔찍한 것 중에 끔찍한 것은
바로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지.

Jedoch der Schrecklichste der Schrecken,
Das ist der Mensch in seinem Wahn.

(김세린 번역)

 

좁게는 괴테와 쉴러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기 시작한 1794년부터 쉴러가 세상을 떠난 1805년까지를 "바이마르 고전주의Weimarer Klassik"로 불리는데,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초월적 문학 전범으로 우상화 되었던 ‘독일 고전주의’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고전적인 것das Klassische’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술적 진보,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바이마르 고전주의"로 명명되면서, 그것이 유럽의 휴머니즘 전통 및 계몽주의와의 연속선上에서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문화적, 미학적 패러다임으로 제한되면서 독일의 고전주의가 어느 한 시기로 역사화 되고 지역화 되는 동시에 민족주의가  탈이데올로기화 되었다(Dieter Borchmeyer 1998, p. 38).

 

괴테가 1786년 9월부터 누린 이탈리아의 눈부신 햇빛을 등지고 근 2년 정도 지난 후 1788년 6월에 바이마르에 돌아왔으니, ‘고전적인 것은 건강하고, 낭만적인 것은 병적’이라던 괴테에게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의 격정의 〈군도〉의 작가 쉴러에게 관심이 없어 가까이 지내지 않다가, 1794년 예나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우연히 만나 둘이서 걸으며 식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급속도로 가까워 졌고, 그 예나의 만남을 "행운의 순간"이라며 괴테는 실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나에서의 만남은 실로 우리에게는 신시대를 기약하는 것"이었다면서 감격해 한다. 4년후 괴테는 실러에게 다시 고백하길 "그대는 나에게 제 2의 청춘을 부여해서 나를 다시금 시인으로 소생시켜 주었어요-그때까지 나는 이미 시인이 아닌 상태에 있었지요"(박찬기 1989, p. 166)  ".

 

괴테는 실러에게 에나대학에서 ‘자리’를 배려했고, 둘은 예나 사이를 자주 오가기도 했고 , 나중에 실러가 1799년 말 바이마르로 이주한 후에는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많아 서신 왕래가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무려 1000 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을 정도

 

괴테와 실러는 어떻게 그리 "존재"적 우정을 나누게 되었을까.

우선 문학적 관점에서 보완성을 들 수 있겠다.

 

괴테의 입장에서, 둘의 관계를 이해해 보자면, 둘은 ‘대립적 본성’으로 표현되는 현저한 문학적 예술적 차이가 있는데, 괴테는 관조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친히 경험하지 않는 것은 쓰기 어려운데 비해, 실러의 예술은 먼저 이상과 관념에서 출발하여 자유스런 상상의 세계를 그린다. 괴테는 인생의 諸 현상에 직접 몸소 체험하며 거기서 우러나오는 체험을 예술적으로 승화-형성시키는 것이다, 즉 괴테는 먼저 인생을 겪고 그 경험으로부터, 관념을 발전시키는데 반하여, 실러는 반대로 먼저 두뇌로 관념을 형성한 후, 거기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을 변증법적으로 형상해 가는 것이다. 전자의 예로 더 물을 것도 없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등이 있고, 후자는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서 잘 드러나는 바, 실러는 유희충동Spieltrieb, 미적 정조ästhetische Stimmung, 그리고 미적 가상ästhetischer Schein 등 추상적인 개념을 전개하며 “미적 국가der ästhetische Staat"의 이상을 제시하는 바, 그의 ‘이념’ 지향성을 시사한다.    

 

실러와 괴테 둘은 첫 독자가 되어 서로의 초안을 읽고 칭송과 비판을 나누기도 하고 구체적인 수정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괴테가 당시 미발표 원고 상태였던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을 개작하여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로 완성되는데 실러의 격려와 비평이 결정적으로 보인다. 또한 쉴러는 괴테에게 〈파우스트〉를 계속 추진하도록 권유했고, 괴테는 쉴러에게 〈발렌슈타인〉을 완성하도록 독려했다.

 

그러고 보니 ‘파우스트’라는 남자는 괴테의 운명이 된 것 같다. 괴테가 십대 -위의 책 박찬기에 따르면- 소년시절부터 이미 〈파우스트〉 희곡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1774년 "베르테르" 출간 무렵인 20대에도 집필해 보려고 덤빈 적이 있으나 여의치 않다가, 그 후 바이마르에서 세속적  ‘출세’를 하면서 오래오래 내버려 두었다가 실러의 격려에 힘입어, 20대에 처음 계획한 이후 아주 늦게 60여년이 흐른 후에야 죽기 불과 6개월 전에 1832년에 완성되는 〈파우스트〉는 위대한 작품성에 힘입어, 괴테는 숭배 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괴테가 격려한 〈발렌슈타인〉은 쉴러의 대표작이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괴테와 실러의 우정은 두 남자의 시인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독문학사에서도 세게문학사에도 아로새겼고, 더 중요하게는 생전에 당사자 둘의 마음에 정신에 영혼에도, 괴테의 표현을 빌면, ‘나는 이 남자를 결코 잊을 수 없다’는 토로처럼 실로 윈윈하며 빛나는 금강석같은 진짜 우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신분 낮은’ 크리스티아네와 동거에 들어 가면서, 바이마르의 친구들과 호사가들의 술 안주감이 되었는데, 괴테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 ‘적의 수가 한 군단’이나 된다’고 불평했다니, 좁은 도시에서 자신의 연애가 스캔들이 되어 버린 시인에게, ‘헐뜯는’ 주변 와중에, 괴테가 꼭 듣고 싶은 말들만 골라서 격려하는 실러와의 친교는 자못 자신의 표현대로 "신시대"의 시작이며 "행운"이었을 것이다,

 

실러는 ‘소박시인’과 ‘감상 시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둘의 문학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실러는 괴테는 현실주의자Realist로 자신은 이상주의자Idealist로 구분하면서 현실주의자는 “자연의 필연성을 통해서”, 이상주의자는 “이성의 필연성을 통해” 규정된다면서 시의 소박성das Naive과 감상성das Sentimentalische을 논하면서 괴테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밝게 살아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지닌 늦게 태어난 북구의 그리스인, 그리스 정신을 가진 독일인으로 평하면서, 당시 18세기말은 괴테는 물론 비일란트Wiekand를 중심으로 그리스 숭배기인데, 쉴러의 해석으로는 괴테는 “직관에서 추상적 사고로” 혹은 거꾸로 “개념을 다시 직관으로” 전환하고 “사고를 감정으로” 변화시키는 ‘소박시인’으로 ,비평, 개념화 하니. 괴테는 실러가 “내 존재의 총체성을 끌어낸다die Summe meiner Existenz ziehen"며 실러의 해석에 흡족하였다.

 

‘男兒가 한갓(?)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권총 자살해버리는 소심한 청춘을 그린 ‘연애 소설가’에서 이후 괴테 자신에게는 물론 독문학사에서 그리고 세계 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 받는 〈파우스트〉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기〉가 실러의 격려에 의해 재집필 되고, 실러 타계 후 1808년에 1부가 첫 출간되면서 괴테는 ‘詩聖’으로 추대된다. ‘내 존재의 반을 잃었다’며 우는 남자도, 자신이 ‘천하의 괴테’의 ‘존재의 반半’’이라는 고백을 듣는 실러도 얼마나 복된 남자들인가. 그 우정은, 220년 후 어여쁜 세린의 마음을 울렸고..,

 

상술했듯, 두 시인이 문학과 예술 창작 방식 등 여러 측면에서 달랐으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서로를 거울 삼아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보충하며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거장의 남다른 ‘울먹이는’ 우정이 큰 몫을 한 것이다. 그것을 괴테식으로 표현하자면,

 

Die Ewige-Freundschaft zieht uns hinan.”

영원한 우정이 우리를 상승시킨다

 

괴테가 장수의 복을 누리다가 마침내 1832년 초봄 83세로 별세했을 때, 그 이듬해 하인리히 하이네는 “신들이 떠나가고 있다. 괴테가 죽었다”며, 청년독일파 시절 하이네는 괴테를 "자식없는 kinderlos"문학이라 힐난하더니, 죽자마자 비평을 넘어 가히 과도한? ‘신격화’를 부여하며, 사실은 ‘흠모 이상’이었던 문학 선배를 애도하는데, 아래와  같이 더 할 수 없는 헌사를 바친다.

  

(신들이 떠나가고 있다.) 괴테가 죽었다. 지난해 3월 22일에. 작년은 우리 지구가 가장 위대한 명사들을 잃어버린 의미심장한 해이다. 작년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갑자기 귀족적인 것이 된 듯, 이 땅의 저명 인사들을 한꺼번에 무덤으로 보냄으로써, 그들의 명성을 칭송하려는 것 같았다(김세린 번역).

 (Les dieux s'en vont. Die Götter gehen〯The gods are leaving) Goethe ist todt. Er starb den 22sten Merz des verflossenen Jahrs, des bedeutungsvollen Jahrs, wo unsere Erde ihre größten Renommeen verloren hat. Es ist als sey der Tod in diesem Jahre plötzlich aristokratisch geworden, als habe er die Notabilitäten dieser Erde besonders auszeichnen wollen, indem er sie gleichzeitig ins Grab schickte .  

 

세린이 작년 8월 바이마르에 도착하였을 때, 한여름 더위가 한 풀 꺾이고 햇살은 밝았으되 그리 덥지는 않아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도시가 밝고 깨끗하며, 조용하여 건축물들도 마치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겨 정말 괴테와 실러의 도시답게 ‘균형과 조화’로운 느낌을 받았다. 오래된 책갈피 속 흑백으로 인쇄된 유명 인물이나 사물들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흑백 인쇄책 속에서만 보았지만 뇌리에서 지워진 적이 없는 바이마르의 괴테와 실러의 동상의 영상이 내게는 그랬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독일에 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은 방문….

 

괴테가 25년간 감독으로 일했던 바이마르 극장 앞에 드레스덴 사람인 조각가 에른스트 리첼이 1857년 제작한 괴테와 실러의 동상을 세린은 정면에서 감상하였다. 익히 들었던 바, 두 남자는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고, 둘의 손은 함께 월계관을 들고, 실러는 왼손에 원고?를 들고서 먼 곳을, 괴테는 왼손을 실러의 어깨 위에 둔 채. 마치 실러는 이상세계를, 괴테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동상을, 블가근 불가원 위치에서 감상하다가 그들의 곁으로 갔고, 그들의 동상을 360도 이리저리 돌며 두 시인을 올려다 보았다, 두 시인을 이루는 물질을 촉각해 보기도 하였다, 두 시인의 ‘뒷태’를 ‘실제로’ ‘처음으로’ 보면서…그 바위처럼 단단한 청동?에 수많은 주름을 넣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실감'을 자아내며 경탄케 하는 조긱가의 장인 솜씨에 찬탄하면서…   

출처, 시인들의 전면과 뒤태, 왼쪽은 구글,오른족은 세린 , 

하지만 내가 다시 정면의 자리로 옯겨와 두 시인을 우러러 보면서, 곧 동상의 실제나 형태, 정조가 어딘지 엉터리라는 씁쓸함이 일었다. 괴테가 많이 손해 본다는 느낌. 두 시인의 나이는 10살 차이이다. 괴테는 1749년 생, 실러는 1759년 생, "바이마르 고전주의"로 일컬어지는 괴테와 실러의 본격 교류기는 두 남자가 예나 대학에서 나눈 담소 이후 가까워지는 1794년부터 실러의 사망 연도인 1805년이니, 괴테가 45살에서 55살이고, 실러는 35살에서 45살 사이이다. 그런데 동상 속 괴테는 55세 정도의 ‘꼰데’ 표정이고, 실러는 20대 젊음과 홍안이 빛난다. 실러는 마치 영화베우처럼 젊은 ‘오빠’ 미남으로 ‘창조되어’ 멋지게 서 있다. 마치 두 남자는 ‘친구’ 아닌 ‘무거운’ 아저씨와 조카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이글을 쓰려고 몇 개의 괴테 초상화를 다시 대했다,   

왼쪽 1786년 37살 가을 괴테. 티슈바인, ‘로마 캄파냐에 있는 괴테’, 1787, 캔버스에 유채, 164x206cm , 여기서도 1787년 이면 괴테는 고작 38살 청년인데, 오른쪽은 마치 40대 후반 정도 중후하게 차려입은 중년남자로 그려 놓았다.

 

조각가나 화가나 작가의 주관성에 따라서 ‘대상들이’ ‘인물들이’ ‘다르게’ ‘창조되면서’ 실체의 본성이나 특성, 개성이 ‘과도하게’ 왜곡되는 일이 다반사겠다는 상념. 하이네가 나중에 〈루드뷔히 뵈르네 회고록 Ludwig Börne. Eine Denkschrift〉에서 괴테의 글쓰기 방식을 “객관적인 자유, 괴테의 방식 objektive Freyheit, die göthische Weise”으로 평가했는데, 조각가나 화가들도 다소 실증주의여야 되겠고 ‘객관적 자유’를 구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후  나는 괴테 하우스와 실러 하우스로 향했다

 

"새벽 세 시에 칼스바트를 남몰래 빠져나왔다. 안 그랬다간 그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기에. 늦여름 혼자서 여행 가방 하나와 오소리 가죽 배낭 하나만 꾸려서는 우편 마차에 올라타고서…." 안개 낀 고요한 베를린의 아침, 괴테처럼 새벽 3시 아닌 4시경, 오소리 가죽 배낭 아닌 더 가벼운 에코 가방 하나와 세린은 그 옛날 낭만넘치는 우편 마차 대신 거대한 베를린 중앙역에서 새벽기차를 타고서 ‘라이프치히대학에선 괴테와 니체,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로 각각 불리는 바흐와 헨델 등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한 독일 동부의 튀링엔 지방을 향했고, 밤기차를 타고서 귀가하였다. 바이마르에서 예나jena행 기차를 타지 않고 베를린으로 향하던 나, 자꾸만 아쉬워, 뒤돌아 보았다는….

 

그 1년이 지난 후 지금 서울에서 강가 호텔 라운지에서 비너스는 괴테의 노래를 음송한다,  

 

아는가 그대는, 레몬 꽃 피는 그 나라를,
검푸른 잎새 속 황금빛 오렌지들 반짝대는
Kennst Du das Land, wo die Zitronen blühn

Im dunklen Laub die Gold-Orangen glühn

하략

(김세린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