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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린 칼럼

보편적 지식인

월드인기스타 지성인 세린 2020. 3. 10. 07:40

보편적 지식인

 

오랫동안 지식인은 진리와 정의를 주관하는 자로서 발언하였으며, 그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사람들은 보편적 진리의 대변인으로서 지식인에게 귀 기울였다. 지식인은 모든 사람의 의식과 양심의 지표로 간주되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 The Political Function of the Intellectual중에서).

 

지식인은 핍박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도덕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일시적인 풍조나 유행을 좇아서는 안되고, 진정한 이념과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지식인이 아니고는 그 어디에서도 나올 수 없다-에드워드 사이드 <권력과 지성인> 중에서.

 

지식인이라니, 구석기 시대의 용어로 들린다. 지난 세기에는 시대의 아방가르드였던 엘리트 지식인 부류들이, 늦어도 21세기부터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퇴락하고 있다, 이 불쌍한 낭만적 지적 기사 집단들은 구제될 수 없을까. 진리, 진실, 소명, 책임감, 정의, 보편성등, 그들의 속성이 재활할 수 있을까.


지식인의 존재론은 2500년전 고대로까지 소급된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에는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플라톤의 관념적 이데아 사상 이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지식인의 꿈은, 당대의 가치와 도덕과 질서를 토론하고 정치, 사회의 제반 현상을 객관적으로 진단·비판하며 변화 내지 변혁의 주체세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나 지식과 정보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정보화 사회는 지식인의 죽음고했다지만, 조작과 허위가 난무하는 하이퍼 정보사회는 사실과 진실을 밝히며 여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며 밝혀 줄 보편적 지식인의 역할이 오히려 더욱 중요해졌고 더욱 요구되어진다. 유례없이 혼탁한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보편적 소명의 지식인들에게 다시 진실의 왕관을 씌어 줄 준비를 하고 있다.

 

광기의 사회악-보이지 않는 악invisible evil

전후, 지금까지도, 서구 민주 국가들은, 권위주의 혹은 독재국가가 자행한 잔혹한 국가폭력을 개탄하고 반성하고 규탄하며 스스로를 고발해 왔다, 한국의 통도 예외는 아니어서, 2018년에는 제주 4 3 사건을 국가폭력으로 규정짓고, 국민을 향하여 지난날 국가가 저지른 폭력을 사과하면서, 피해자들을 위한 명예회복과 배상과 보상을 추진하였다. 70년대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공산 정권의 참혹한 17십만 명의 학살은 국가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 서구는 국가폭력을 또다시 깊이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020,1, 23, 이스라엘에서 개최한 유태인 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 기념식에, 무려 50개국 이상의 국가 수뇌부들이 참석, 자국의 조상들이 저지른 유태인 만행을 이스라엘 국민을 향해서 반성문을 발표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도, 홀로 분개를 터뜨리던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향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이스라엘 편에서서 이스라엘을 보호하는데 일조하겠다고 다짐하는 독일의 대통령도 보였다, 잔혹한 국가 폭력은 게몽시대 이전에도, 근대에도 탈근대에도 자행되어 오늘에도 여전하여, 최근 유럽의 시나고게의 사보타쥬에서 보여지듯, 유태인 혐오와 테러의 빈도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 이스라엘과 유럽은 긴장하고 있다.

 

2천년도 넘는 유럽인들의 유태인 혐오와 만행의 사회악의 근저에는 우리 의식도 한 몫한다. ‘우리라는 공동체는 前面으로는 순박하고 훈훈한 외양 뒤로 폭력을 숨긴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우리 아닌 저들의출현에 대해, 집단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우리보다 저들이더 우월하거나, 저들이 더 부유하다면, 끓어오르는 인간본능인 시기질투는 르상티망을 일으켜, 고통스런 생존의 억압에 종속된 비참한 삶을 영위하던 공동체는 기근, 흉년, 전쟁, 혹은 전염병이 도는 등 공동체에 재난이라도 닥치면-혹은 일부러 계기를 만들어서라도-분풀이할 희생양이 필요했던 몽매한 군중은 작은 선동에도 날뛰는 폭력의 주체로 한다. 페스트가 유럽에 창궐했던 14세기 스트라스부르에는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어 전염병을 유발시킨다며 2000여 명을 산채로 태워 죽였다. 이 어두운 서구사, 사회악의 발현인 유태인 혐오는 21세기 문명시대 오늘에도 건재하다,

 

미개한 사회악은 오늘 한국에서 만연하다, 90%이상이 민족인 단일민족사회를 이루어 살며, 유태주의같은 외부적 요인이 없으니,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면, 내부에서 희생양을 찾는다. 그것은 때로 드러나는 국가 폭력보다도 더 은밀하게, 무자비하게 자행된다. 한국 사회악의 주체들은 선의 가면 뒤에 숨어 있다. 이들의 폭력 대상은 비판자들이다. 자신들의 행위에 정치가도 시민도 지식인들로부터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은 채 안일한 기득권 속에서 부패하게버텨온 이들 기존 집단은 작은 비판조차도 차마 견딜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의 위대한 철학자라도 ·돼지 패듯비판을 가하는 비판 문화 속에서 비판을 통해서 개선과 발전을 지향하는 서구사회와는 달리, 비판의 경험을 당한 적이 없는 안온한 집단은 조그만 지적 하나에도 경기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지적자를 당장 적대시하면서, 각종 음해와 인격 살인을 가하며 조작하여 개돼지 패듯난동, 난타한다.

 

매스컴 테러리스트들은 私的 개인의 이메일을 무단 침입, 가장 내밀한 사적 정보를 채취, 그 정보를 이용, 또 다른 허위, 날조를 부가하여, 각종 첨단 매스컴과 디지털 매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까발릴뿐만 아니라 중상모략 하여, 사적 개인의 사생활 기본권과 인권을 함부로 침해하며 즐겁다. 가장 내밀한 사적 가족간의 문제를 온 세상에 퍼뜨려’ ‘가족 해체를 부추키며 논다’. ‘가족문제는 오해되고, ‘해결은 요원해 진다. 매체와 매스컴 테러리스트들의 수단과 목적, 야누스적으로 양면이 악이고,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는 악이다.

 

매스컴 테러리스트들은 스스로의 악행과 범행을 모른 체 하며, 이들의 폭력 기구인 첨단 매스컴을 통해 총체적으로 선동하므로, 그 폭력성은 전국 구석구석 지리산 청학동은 물론, 뉴욕 맨하탄을 지나, 아프리카 사파리들에게도 이르는 날조와 조작을 중계하여, 표적된 시민에게 최고 효율적인 치명상을 가하며, 악의 놀이play of evil에 열정이다. 매스컴 테러리스트들은 악의 행위자player of evil’들이다.


폭력배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은 스스로 전면에서 나서기 보다는 무지한 연예인과 군중들을 동원하여 뒤에서 음습하게 교사한다. 비판자들을 날조하며 심지어 살해와 자살로 유도하며 광란한다. 그런데 폭력배들만이 사회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동조하는 의 가면을 쓴 의 식자들도 있다. 이들의 악의 생산수단은 술수는 외견상 부드러운 문장에 덧붙혀진 옳으신 말씀들이다. 이들의 문체는 외면상 폭력도, 거칠음도, 지시어도, 언명도 없다. 교묘하게 비판자를 표적하여 그에 대해 혐오와 증오를 조장하며, 보이지 않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버 폭력을 가하며 음침하게 들끼리서로 교감한다. 익명의 문장 뒤에 숨어서 대상을향해 끝없는 반복을 통하여 폭력을 가하여 종래에는 대상의 자살을 유도하는 신종 한국판 킬링필드다. 평소 지리멸렬한 인생에 불만 많은 위선자들은, 조작하여 표적한 내부의 적을 겨냥해 함께칼춤 춘다. 하물며 조금 냉철한 식자들조차 매스컴의 조작과 선동에 쉽게도넘어가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매스컴 선동믿고서’, 비판자를 함께’ ‘비난한다’.

 

이 어두운 음침한 어둠의 매스컴 테러리스트들의 숨은만행을 티끌하나 눈치채지 못하는 외로운군중은 폭력배들과 함께광란 중. 매스컴 폭력은 구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invisible axis of evil 악의 축이자 사회악society evil이며 이들의 악행이, 수많은 시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며 폭력을 가하니, 현금에 심각한 사회 문제다. 획일적 99% 집단 사고로 똘똘 뭉친 사회에서는 드레퓌스가 죽어간들 32쪽이 아니라 한마디할 에밀 졸라는 존재한 적 없으며, 이순신을 옹호할 유성룡의 후예는 없다. 한국 매스컴의 날조에 경도되지 않을 차거운 서구의 매스컴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다수에 함께할 뿐...

 

자신이 세월과 함께 개·돼지가 되어간다며 한탄하던 인문학자가 있다. 자신을 성찰하는 식자가 좋다. 더욱 바람직한 식자의 태도는 사회악과 국가악, 권력에 맞서는 용기있는 개입하는식자이다. 도덕적 이성에 기반하여 정오와 선악을 가름하는’ ‘판관 지식인의 역할 말이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입장에서 당파성 없는 세속적판단을 행하는 지식인의 비판적 재현을 통한 담론적 참여engagement 말이다. ‘말하는’ ‘개입은 분명 행동’action이며 행위자player이다. ‘올바른 재현이라는 쉽지 않은 행동을 통한 담론적 비판의 주체와 현장의 행동 주체는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투쟁을 행하는 주체들. 지식인의 글쓰기와 말하기와 행동은 이음동의어tautology이다.

 

대개의 식자들은 자신의 이윤과 보상의 기제에 묶여있고 자신의 세력 확장과 공고화를 추구하는 욕망 속에서 전문가적 직업적 지식인의 틀에 구속되어 있는 반면에, 공동체와 사회와 세계에 대해 더 큰 관심에 기반한 소망에 따라 사상과 가치에 따라서 행동하는 식자들이 있다. 이른바 사이드의 아마추어리즘적 지식인들이다. 이들이야말로 한갓 보상 밝히는’ ‘전문직 식자에서 지식인또는 지성인으로서 상승하고, 인류애적인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생각과 사상을 펼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비로소 사회악, 거대 집단 세력,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대안적이고 원칙적 입장을 지닌 지식인이다. 이들은 광기의 사회악을 수 있으며 견제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심성과 지성의 샘이 고갈되어 가고 있다 (원래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수없는 잡다한 정보 꾸러미를 가슴과 머리에 가득채운 정보 집적체인 로봇 사람들은 심성이 없으니. 상대를 왜곡, 해꼬지, 물어 뜯고, 헐뜯는 일에 전념한다. 방송 매스컴과 디지털 매체들은 公紙面과 공공 미디어의 본질에 해 심뽀, 심통, 심술의 악성 표현들, 글급도 기사급도 못되는 저질·악성 잡문들이 만연하다, 공공선에 이바지하는 공적 기능은 커녕, 멀쩡한 생사람잡는 매스컴 괴물들이다, 매스컴들은 이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초 소양과 교양이 결핍한데, 그 전파성은 지대하므로, 나라와 사회를 흉측하게만든다, 한국이 상놈 사회화mob society’가 된들 누구 책임일까.

 

매체는 (지난날 수많은 자살 연예인들이 증명하듯)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집단 흉기 헐크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 매스컴 테러리스트들의 횡포를 일깨워 줄 지성인 한명 없다. 빈곤한 지성, 또 그만큼 빈약한 용기는 사회악의 만발을 침묵하여 결국 악의 번성을 부추키기도 한다. 한편 일군의 식자들은 아예 흉기의 흉물스런 조작에 동조자이다. 그 어떤 식자도 매스컴 테러리스트들의 횡포를 문제 삼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매스컴 세력의 횡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미지 파괴 흉기를 휘두르는 매스컴 테러리스트들로 부터 한번 찍히면’, 자신도 이 획일적 한국 사회에서 왕따 당하여 외로울까 겁나기에, 아예 ’99% 대다수의 테러에 동조하며 단꿀을 빨며 눈치조차 빠르다. 사회에서 지식인들을 찾아 디오게네스가 등불을 들고 돌아 다닌다는 소문...

 

지식인이 말한다reden’는 것은 단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관찰한다본다beobachten=sehen’=이해한다verstehen를 동시에 수행하는 지적 과학적 행위이며, 공개적일 경우에는 지식인의 말한다는 아가쥬망이다. 쓴다는 것은 단지 쓴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동한다는 행위 하나만을 뜻하지 않는다, 본다,말한다,듣는다, 행동한다,쓴다, 이해한다는 하나의 유기를 이루어 의미의 단일체이며 총체가 된다. ‘본다하니 듣지는 않고 보기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다하니 말만 한다가 아니다. 우리가 ‘tv를 본다고 할 때, 티비를 보며, 들으며, 이해하며등등의 뜻인 줄은 삼척동자도 이해한다. 지식인의 본다와 beobachten은 모든 이성적 사고의 출발점이며 고도의 객관적 과학적 행위이다, ‘본다는 또한 듣기와 말하기, 쓴다는 인식 행위로서 토론의 공론장과 해결로 가는 출발점이다, 보는sehen’ 출발점 없이 이해한다verstehen’의 열린 결승점은 없다.

 

오늘 나는 지식인없는 사회에서, 나의 지식인에 대한 견해를 두서없이 피력할까 한다. 미리 한마디로 줄이자면, ‘소명적 보편적 지식인부류들의 출현을 소망한다.

 

사르트르는 19669월에 일본 대학에서 행한 강연 내용을 묶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으로 본다, 가령 한 군인과 군 참모부의 갈등에 불과한 드레퓌스 사건에 자타칭 지식인들이 남의 일에 끼어들었는데, 그들 중에 군인은 없었고, 소설가, 법률가, 과학자 등이 참견을 시작. 목소리를 내고 개입하여, ‘드레퓌스 사건은 결국 정의로운 결말을 짓는 데에 일조했듯...사르트르는 두 부류의 지식인을 언급했다, 특정 분야의 지식만을 쌓은 기능적 지식인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복무할 뿐이며, ‘지식인은 마땅히 보편적인 선을 대변하는 보편적인 지식인이기를 기대한다. ’지배 계급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샤르트르의 보편적 지식인은 진리와 법칙이 갖는 보편성’,‘다수계급의 인간 해방에 봉사한다.

 

(좌파 지식인 사르트르는 사실 왜곡의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샤르트르는 6·25전쟁을 미국의 사주에 의한 한국의 북침(北侵)으로, 소련의 조직적 인권침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련에는 완벽하게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했고,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고발한 망명작가 솔제니친을 '시대착오적 인물'로 폄하했다.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혁명적인 인물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강변했으며, 1960년대의 드골을 나치에 비유하며 비방하였다. 사실 드골이 나치와 싸우는 레지스탕스였을 때 사르트르는 파리에서 한가하게(?) 연극이나(?) 쓰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식인은 진리와 정의를 주관하는 자로서 발언하였으며, 그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사람들은 보편적 진리의 대변인으로서 지식인에게 귀 기울였다. 지식인은 모든 사람의 의식과 양심의 지표로 간주되었다고 설파한 푸코는 역사적 단계의 필연성에 따라 프롤레타리아를 보편성의 담지자로 간주하며 지식인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샤르트르의 보편적 지식인을 부정한다, 푸코가 보기에는 일명 보편적 지식인들이 비록 자신들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특정 시대의 지배 블록의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 마찬가지로 푸코에게 진리는 세상에 속한 것이다. 진리는 특정한 시대의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복합체의 산물이며, 당대 사회적 담론은 선택.조직.재분배를 수행하는 권력의 진리 레짐에 의해 생산과 유통의 특정한 절차에 따라서 통제 된다고 본다. 이 담론의 생산 과정에 지식인이 관여하여, 진리 체계의 대리인으로서 블록의 권력의 생산과 재생산에 기여하여, 푸코는 모든 지식은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푸코가 보기에 보편적 지식인universal intellectual’들은 샤르트르를 비롯 주로 좌파 법조인들, 학자, 작가들이었다. 정의의 보편성 및 이상적 법률의 공정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이른바 이들 보편적좌파 지식인들은 정의와 진리에 정통한 듯 우리 모두의 의식과 양심과 같은 보편성의 담지자인 냥 행세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아왔는데, 그러나 푸코에게 이들 보편적지식인들의 보편성, 모범, 진리와 정의의 위상은 없다, 푸코는 보편적 지식인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인 전문가적 지식인specific intellectual을 소개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 자본주의의 성장이 과학 기술의 발전에 크게 의존하면서 생물학,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 분야 전문가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었는데, 이들 푸코의 전문지식인은 보편성 보다 구체성을 띈다, 즉 진리, 정의 등의 관념 아래 활동하는 대신, 주택, 가족, 병원, 실험실 등 근로 조건에서 활동하는 구체적이고 비보편적인 문제들에 직면한 '전문가적 specific' 지식인들로서, 푸코는 핵과학자 유전공학자 자료처리전문가 약물학자, 사회복지사, 실험실 기사, 정신과 의사, 사회학자들을 꼽는다.

 

푸코에 따르면 한 시대의 진리란 그 사회에서 경쟁하는 힘의 반영이다. 경쟁하는 복수(複數)의 지식들 중에서 하나의 진리가 지배 블록에 의해 간택되어 사회의 각종 메카니즘을 통해 대규모로 확산되고 소비되는데, 그 선택된 진리는 학교, 대학 군대 출판 대중매체 등 몇몇 거대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장치들의 지배 아래에서 재생산되고 전파된다, 말하자면 시대마다 권력과 지식이 결탁해서 각 시대의 지식, 진리를 낳는다는 논리다, 어느 시대에나 그람시의 지배블록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생산을 위해 진리가 요구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속적인 정치적, 경제적 동기에 의해 모종의 진리를’ ‘정립한다’. 그러므로 특정 시대의 진리는 지식을 진리이게 하는 '(power, 권력)'의 결과물로서, 그 진리란 '누군가를 위한For whom‘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적 전문가이자 동시에 실천적 시민인 지식인들은 시대의 진리에 대해, 그 명증성과 일반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당연시되어 있는 사유 방식과 행위, 그리고 규칙과 제도의 자의성 혹은 역사성 및 변화 가능성을 제시해줄 책임이 부여된다. 푸코는 인간의 정신 속에 자리잡은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는 일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본다.

 

주지하시피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구성된’ ‘orientalism’타자에 대한 허구성과 폭력성을 폭로한 역작 <<오리엔탈리즘>>(1978)의 저자이다.

 

우리나라에서 1996<권력과 지성인>으로 번역 출간된 사이드의 저서는 원제가 <<Representations of Intellectual>> <<지식인의 재현>>으로서 주로 지식인의 담론 재현을 다루고 있다. 1993년 영국의 BBC에서 행한 사이드의 강연 내용을 묶은 이 책에서, 유의미한 지성인은 비판적 자세는 없고 현실에 배불러 스스로를 상품가치가 높은, 비논쟁적이고 비정치적이며 객관적 입장을 취하며 퇴행적 관습을 수용, 기존 권력 규칙에 길들여진 채 이익과 권력의 고용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전문가professionalism적 식자가 아니라, ‘비판적 감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형식의 재현을 통해 자신의 주장과 이념을 표명하며, 사회의 약하고 대변되지 못한 자의 편에서, 인간의 자유와 지식을 발전시키는 아마추어리즘적 지식인이다. 이 아마츄어리즘의 지식인들을 사이드는 당파성과 개인의 이익에 메이지 않는 보편적 지식인으로 간주한다.

 

지성인이란 누구인가, 국가와 전통의 차단, 지성인의 추방, 전문직업인과 아마추어,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함, 언제나 실패하는 신들등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사이드는 권력과 이에 비판적인 '재현의 주체'로서 지성인의 역할은, 그가 속한 사회의 제반 현상을 객관적으로 진단하며 대중매체에 의해 유포되는 절반의 진실이나 통념의 불완전성이 마치 진실인 냥 유포되지 않도록 하며, 여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 있다고 본다, 다른 이질적인 집단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으로 인식돼온 출신,배경.언어.민족성등의 툭수성을 초월하는 지식인의 객관적 입장은, 국가의 대외정책이나 사회정책 등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집단 세력인 국가, 종교, 민족, 사회등이 특정 집단을 괴롭힌다면, 그것을 비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지성인이다.

 

사이드는 전문직업적 식자들과 아마추어리즘적 지식인을 하면서 자신을 상품화하며 비논쟁적이고, 비정치적이며 고래의 관습과 규칙에 길들여진 중립적 전문가적 professionalism식자들은 때로 더 위험할 뿐만 아니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며 경고한다. 이들 비싼 몸자랑에 열심인 전문가(professionalism)들은 퇴행된관습마저 수용하고 establishment의 규칙에 길들여진 채 세력에 고용되기를 갈망하며, 오늘날 한국을 비롯, 세계 어디에나 절대다수로 편재한다.

 

반면에 권력의 오류에 대해 비판적인 재현의 주체로서, 다양한 형식의 재현의 용기를 통해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자유와 지식을 발전시키는 사이드의 아마츄어리즘적 지식인은 대개의 전문가 식자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침묵과 구별되어, 집단적 세력이 추구하고 조작하는 집단성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여 세상에 만연한 무지몽매를 밝히며 위험한 광기를 제어한다.

 

사이드에게 바람직한 지식인 상은 전문적 식자들의 방편인 최대의 이윤 추구에 구속되기 보다, 공공선·공정의 가치를 중시하며, 인류애와 대의에 따라 행동하는 아마추어리즘 지식인이다, 이들 지식인은 진리와 진실의 독립성을 확보하여 보다 보편적인 가치와 원칙들에 준거하여 정의를 말할수 있는 대안적이고 원칙적 입장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있다.

 

사이드는 집단사고의 내용과 의도를 회의하고, 의심하며 스스로를 집단과 거리를 두려는 추방된 지성인을 옹호한다. 사이드는 옳다고 알고는 있으나 행동을 취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회피를 비난한다, 그들은 논쟁적으로 보이기를,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주요 시기에 중립을 지켜, 세상의 올바른 원칙을 외면한다, 이는 역사적 주요시기 에 중립의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지옥으로 보낸 단테의 사상과 일맥상통 한다.

조선시대의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왈가왈부가 지식인의 사명이었다. 어떤 일에 대해 정오 즉 옳음과 그름을 가름하며 논쟁하는 것을 왈가왈부라고 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한국 고전에서 왈가왈부는 긍정적 의미로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왈가왈부라는 말이 50번 정도 나오는데, 나쁜 뜻으로 쓰이기는 커녕, 그것은 자못 아름다운 일이란다.


조정에 일이 있으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의논할만한 일이 있으면 왈가왈부하여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사람의 의견은 각자 다르기 마련이니, 왈가왈부하여 옳고 그름을 공평히 가리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나랏일은 한 사람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왈가왈부하여 지당한 결론을 얻도록 힘쓰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는 서로 다른 의견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왈가왈부의 토론 문화를 높이 평가하여 아름답게여겼다. 더욱이 나랏일일수록 왈가왈부하여 지당한 결론을 얻도록 힘쓰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강조하니, 현대의 공론화절차에 버금가며, ’조선시대의 어떤 수준이 보인다. 맹자의 주장처럼,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곧 지식인의 본성이니.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유 (표현의 자유)를 권고하는 500년전 조선시대는 이미 현대 민주주의의 요체인 표현의 자유를 일찌감치 간파했던 듯 하다.

 

수백년전 조상들이 중하게 여겨 긍정한 왈가왈부문화를 한국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계승했을까. 지식인의 안면은 대부분 안일한 전문적 직업에 종사하는 쁘띠 부루주아들로서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 지식인Intellectual으로 존재했는데, 러시아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에서 한국 지식인의 전통을 찾기도 한다. 고등교육을 향유하고 교양을 쌓은 인텔리겐차는 전문화 식자층과 구별되어 그들이 속한 사회와 역사에 대한 知的 복무 이상의 사명, 곧 정의와 책임, 희생 등의 윤리적 소명 의식에 의해 정의되며. ‘행동하는 지성이기도 했다.

 

관건은 앎과 행동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는 인텔리겐차에 속할 수 없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이면서 혁명가들이기도 했듯, 무릇 한 사회에서 높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식자라면 그 사회의 하층민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투쟁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요구된다, 따라서 인텔리겐차의 지성은 휴머니즘에의 호소와 겹친다. 체제 저항의 동유럽의 인텔리겐치아형 지식인 유형이 우리 사회에도 반짝이어져, 1980년대에 반권위주의의 투쟁적 인텔리겐차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을 지나 드높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대안적 비전 제시와 실천보다는, 그들은 대거 권력에 참여하고, 국가 권력의 일부로 변신하여 과거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이 가졌던 도덕적 위상은 붕괴되고 스스로 부패한 권력으로 변질하였다

 

반면에 서유럽이나 미국의 지식인Intellectual의 전통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 이후로, 르네상스, 계몽기, 근대, 현대로 이어진다. 유럽 지식인들은 현실 사회·정치 체제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발전 방향이나 미래상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거나, 필요하면 행동에 나서는 일은 알려진 사실이다.

 

기술의 발전과 정보화, 지식의 전문화가 가속화되고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각 영역에서 독자적인 지식과 활동 논리가 등장, 과거와 같은 포괄적 이론가나 지식인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고들 하지만, 지식인이 비판의식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면, 인류 사회에 부패, 부정, 평화, 전쟁, 인권 탄압, 극심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세계 어느 나라나 항시 비판적 지식인의 존재는 요구된다. 정치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제도, 구조를 직시하며 진단, 설명 분석하며 대안까지 제시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된,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 현대 지식인은 오롯이 세상의 귀중한 보석.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누구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1.최후의 지식인-생존수단으로서의 전문직 식자들

나는 학자와 식자(법률가, 의사등)와 지식인을 구분한다. 세 부류 모두 공통적으로 보통이상의 체계적 전문적 지식을 쌓은 지식 계급들이다. 전자 두 부류는 지식 기반 전문직 종사자들로서 전문 지식을 생활수단으로 사적 생활을 의존하고 영위하는 쁘띠 부르주아들이다. 인류의 복지를 위한 보편성이 아니라, 자신만의 특수한 필요와 욕구의 체계 속에서 사적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전문가’ ‘쁘띠 지식인들이며 사이드의 전문적지식인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절망없전문직 종사자들을, 헤겔의 표현을 빌어, ‘최후의 식자들로 부를 수 있다, 개인적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지식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 전문가들은 지식 기반 professionalism 직업인들로서 대학의 학자가 그렇고, 병원의 의사, 법률가들이 이에 속한다. 푸코가 말하는 전문가적spezifisic intellctuals 지식인들이며, 자신들의 근로 공간 안에서, 전문직 직업에 묵묵히충실하다. 사회의 정의와 정치적 옳음, 공정성을 따지는 정치사회의 이슈는 이들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설사 관심은 있다 하더라도 말하지 않으면역시 professionalism 식자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회적 존경과 넉넉한보상을 자랑하는 최후의 지식인이지. 명예로운 비판적 지식인의 회원은 못된다, 단순히 지식에 의존해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관심이란 후쿠야마 식으로 언급하면, 프로 스포츠와 여성의 유방 선에 눈길을 주는 단순 소박한 소시민들이다. 전문식자들은 때로 자신의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진실을 왜곡시키거나, 사실을 왜곡 해석하며 이성의 도구화에 열중하기도 한다. 이들 전문가들은 비판적으로정치 사회 현상과 논쟁을 벌이며 쓸데없이 참견하는 비판적 지식인들과는 구별되는 professionalism전문직이다.

 

이 식자들은 유력 신문지상에 자신의 전공과 관련 이야기할 뿐, 부패하고 비리한 정치사회현상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그 중에는 사회의 다수와 영합한 편안한명함 장사꾼들도 있다. 이들은 자연과학자이거나 인문철학자이거나, 두루뭉술 학자이지, 과 정의에 대해 민감하며, 부패사회를 비판하여 종래에는 변화와 발전을 부르는 고귀한지식인 범주에 들지 못한다. 만약 그들이 전문직에 종사하면서도 정치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며 비판하며 점진적 개선을 지향하여 약자들의 편에 서는 자세를 견지할 때, 우리는 그들을 지식인라고 부른다.

 

배부른 최후의 전문직 식자들은 공동체의 정의에 무지하다. 이들은 공동체의 일거대담론이라며, ‘모르니스스로 회피하며, 학생들에게도 대의에 대한 논쟁을 피하라고 지시하며, 그럼으로써 몰래 자신의 무지를 숨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단독자인 전문직 식자 개인들은, 평소 시간 재벌답게 밤낮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내면적 질문을 던진다. 눈 밝은 인문학자라면, ‘특수한 나의 내면이란, 한갓 이기심과 탐욕의 덩어리임을 곧장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소한 초라한 나의 내면 깊숙히에 수많은 상처 속의 진주를 발견하려던 가엾은 전문 식자의 내면은, 옹색한 소시민 주제도 못되는 도처에 널린 이기적인 사람의 범주에 속할 뿐, 인간과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없는 지적 정서적 둔감으로 인하여 이면의 지배논리를 인지조차 못한다. 이 배부른 최후의 철학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민으로서, 보다 더 큰 가치와 더 나은 현실을 지향하려는 성찰은 끝내 불능하다,

 

관조적 최후의 내면적 식자들은 오히려 함께사회악에 폭력에 적극참여한다. 폭력과 사회악의 다만 보이지 않는주체이다. 침묵이라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말로써 글로써 사회악을 선동 조장하고 동조하며 동의하며 군중과 함께’ ‘숨은테러리스트가 된다. 외로운 다른 식자들도, 가면 쓴 자의 동조자가 된다. 다수로부터 소외의 두려움과 인간 본성의 공격성이 버무러져. 한국인 본성의 특징인 경쟁시기질투의 날것 감정 상태에 머물러 있는 미개인 비문명인들답게 언어폭력, 매스컴 폭력에 함께가세한다. 폭력적이고도 편협한 위선과 이기심, 무식으로 무장한 일면 전문직 식자들은 지식업에서 기생하며’, 사회의 올바름을 그르친다. 기름진 가짜 최후의 식자들이 유들유들한 것은 선의 가면을 군중들이 알아채지 못한 데 있다.

 

케인스를 존경한다는 어느 경제학자가 나는 책상 물림 학자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을 때, ‘글만 읽는 세상 물정 모르는 벽면 서생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들고, 오히려 존경스러웠다. 케인스는 명쾌한 일반론을 구사하고 논의한 걸출한 경제 학자였으면서, 국무에 헌신한 모범 관료 애국자였고, 멋부리는 문화인이었고 또한 세상일에 참견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다중 복합체케인스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 왈가왈부 지식인이기보다는, 학자 케인스처럼 연구와 발견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줄 이해하기 때문이다. ‘열정적 학자로서 살겠다는 학자의 각오는 존경스러운거다. 실로 이성과 논리에 봉속하거나 때로는 그에 순교도 서슴없는 비타협적 부류들인 학자들, 그들은 그 비사교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기보다는 학문이라는 고독한 에 매달린다. 학자들은 시끄럽게 세상과 사회와 논쟁을 벌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천직인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적 풍모는 게으른 식자들에게는 모범으로 보인다,

 

막스 베버는 사실의 객관적 탐구에 천착하는 것을 학자로서의 윤리로 간주한다. 베버는 직업으로서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대학강단에서 이데올로기나 어떤 다른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선전하는 Demagoge데마고그나 예언자 역할에 회의적이다. 모름지기 학자는 연구실을 지키며 논문생산에 몰두하여 학문적 탐구에 전념하고 헌신하여. 학문의 강화와 지식의 확대를 통하여 정치, 경제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참여, 기여하며, 사회적 역할을 증진하게 된다.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학문의 중립성이 빛나는 모멘트이다. 그런데 학자가 정치적으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학문과 기술과 과학의 발달은 물론, 사회에서의 공적 논의와 공정한 판단의 지평을 확대하고, 공공선과 정오선악의 판단을 도우며 개입하여 왈가왈부 중립적 심판관역할을 한다면 그는 존경스런 학자이면서도 고귀한 지식인인 것이다.

 

학자는 지식인이 아니다, 학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는 관조자들이며, 신적 행복을 누린다고 했다. 이 관조적 철학자는 그러므로 혼탁한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던지지 못하고서 언저리에서 관조만 열심이므로, 저홀로 즐거울지는 몰라도, 필자가 의미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승격되지 못한다. 지식인은 단순한 관조를 넘어 가치 판단을 해야 진정 행복한 철학자 지식인이다, 실천적 지식인의 과업이란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일이고, 그 변화의 동인을 이끌 출발선을 인식’ ‘의식하여 행동을 수행하는 책임이다.

 

2.보편적 (소명으로서의) 지식인.

지식인은 편린 지식의 창고체도 시사를 포함 각종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다. 지식인이란 오랜 지식활동의 훈련을 받은 자들로서 체계적 지식의 보유자이며, 재현 수단인 글과 언어로써 공공선, 정오正誤, 선악에 대해 토론한다, 무지와 오류에 사로잡힌 여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식자라도 비리와 부패, 불공정, 부정의에 무심하면, 무비판하면, 지식인이 못된다. 지식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진영의 이익을 대변하기 보다는 독립적 개인주의로서 사회와 세계와 연결되어 보편적 세계관을 지녀서 그에 합당한 언행을 해야 한다,

 

세상의 밝은 빛을 본 지식인은 어두운 동굴로 다시 내려가, 쇠사슬에 묶여 오류에 목매달고 있는 노예들의 눈바라기 방향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지식인의 비판적 이성은 非正의 공정한 왈가왈부를 통하여 정의로운 심판관역할을 해야 소명으로서의 지식인으로 상승한다. 푸코가 비관적으로 서술한 저 숭고한 진리와 정의의 주관자이며 심판자로서의 지식인상은 신화가 아니다, 지식인들은 다시 진리와 정의의 주관자로서 대변자로서 기대되고 활약해야 한다,

 

지식인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현상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세상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대의의 식자들이므로, 이성과 연민, 자제prudence와 더불어, 절대자가 떠났으므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명, 책임감, 사명감 속에서 의식적 지적 실천가로서 세계의 진실과 올바름의 문제에 천착하여야 한다. 한국의 식자들은 대체로 지식과 지성의 빈곤, 심성, 세계관 부재. 소명의식 결여. 편린으로서 지식이나 정보의 수집가이다. 진영 논리에 경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지식인들과 비교적으로 유난히 돈과 세력과 권력을 탐한다. 이런 저급 속성으로는 객관적 현실 진단과 분석은 허약하고 공공선을 우선하며 정오선악의 심판관 노릇을 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는 아무리 삼류 나라라도 단 한명은 갖춘 그것이 없다. 올바른 청량한 목소리로 말하는 보편적 지식인 말이다. 한 사회의 지배적 담론에서 참 vs 거짓 진술을 구분하며, 판단하며 말하며 싸우는 존재가 지식인일진대 그것을 판독할 고고학적 지식인들이 없고 배부른 계보학적 지식인들만 무성하다. 글자는 알되, ‘은 모르며, 공공의 선, 정의, 공정에 대하여 시시비비조차 못하는 無知최후의식자들, 자유부동하는 지식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작금에 최후의 식자들은 정치시회의 숱한 불의와 부조리에 침묵으로써 불의에 봉사활동은 물론, 스스로도 퇴행과 부패를 자행하는 부패의 주체로 활약한다.

 

소명의 지식인들에게, 진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진리란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민주적 다수결로써, 포퓰리즘으로써, 세력의 강약으로 진리를 특정 시공간에 아래에서 아전인수격으로 재단 할 수 없다. 애매모호한 지식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유일무이한 그의 고고한 지위를 버린 적도 잃은 적도 없다, 1+1=2는 진리이지. 진실의 영역이 아니며, 권력이나 세상의 어떤 힘이 작동하지 못하는 추상적 진리의 세계일 뿐. 모종의 진실일 수는 없다.

 

정보 인플레의 시대, 누구라도 선동하는 데마고게Demagoge가 될 수 있고, 그것의 피동적 사보타지 대상으로 선동당하기 일쑤인 단순 무식한 대다수 민중들이 광란하는 사회, 당면하는 문제나 이슈를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제시하거나 비판하거나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제시하는 일은 오직 지식인만이 할 수 있는데, 이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지식인의 역할은 애드가 사이드가 말하는, 사적 이익에서 벗어나 객관적 중립적 아마츄어리즘 지식인으로서, 누구라도 모두 옳은 극단적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말하는그는 최초의소명의 보편적 지식인상이 요구된다, 세계 속의 ‘21세기형지식인은 5000년 동안 만연한 무지 몽매, 거짓, 비리를 비판, 개선을 꿈꾸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21세기 한국형 세계화를 제대로 구상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진저, 동시에 21세기 문명 표준의 변방이 아닌 중심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보편적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며 실천적 전문가적 식자이다. 이 실천에는 말과 글, 행동, 매체를 통하여 세상과 논쟁한다. 상아탑이나 병원이나 법원에서 담장 속 그들만의 안식처에서 안일하지 않다. 도덕적인 정의로운 보편적 지식인은 사회적 정의와 공공선을 정의definition하고, 시시비비를 논쟁하는 지적 노력 속에서 참견하고 판단하여 말한다’, 보편적 지식인들은 정치철학자들과 사회이론가들이 생각해왔던 유토피아는 물론, 실현 가능한 최선·최고의 정치체제, 제도 내지 사회체제best regime를 구상하고, 전체와 부분, 다수와 소수, 개인과 사회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토론하면서, 시대의 제반 문제를 발견하고 그 지양책을 추구하여 나라와 사회의 변증법적 상승을 견인한다.

 

보편적 지식인은 오래 훈련된체계적 지식을 쌓았고, 그 지식에 기반하는 근로자로서, 자신과 주변을 위한 특수 생존에 메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공공선과 사회선, 국가선, ‘인류의 문제’, 더 나아가 우주적 문제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는 엘리트 식자들이므로, 묵묵하며 자신의 필요,욕구 체계에만 몰두하는 소시민 전문 식자들과 돈만 많은 전문적professionalism 직업인과는 애초부터 그 본성에서 다르다. 그리하여 배부른 전문 식자들은 논쟁의 고투와 피로, 욕설과 비난, 조롱이 뒤섞인 빛나는 성지聖地소명의 지식인의 마블 아크로 언덕으로는 올라오지 못한다.

 

보편적 지식인들은 참여적 관찰자로서, 참여적 지성인으로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진영 지식인과 구분되어 공정한 심판관 역할을 해야 한다, 앞서 말했지만, 몽매한 사회에서 공공선과 정오선악의 공정한 심판관 역할은 소명의 보편적 지식인이 안하면 할 사람이 없다, 사회의 지도층이라지만 사태나 사안을 판단할 지성 결핍자들이 태반이다, ‘바보가 칭송받는 사회 문화적 분위기, 여기서 바보란 순수를 의미하기보다는 정치적 옳음과 사회적 옳음과 사회악에 대해, ‘판단할 지적 기반이 없고, ‘’ ‘할 수 없는’ ‘무지를 갖춘 바보인사들을 가리킨다. ‘판단이 불가한 무지자 지도층이 흔하다.

 

보편적 지식인은 진리말하는사람들이다. ‘임금님이 벌거숭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침묵은 지식인의 경멸이며 보신용에 불과하다. 현대의 보편적 지식인은 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닮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모순과 군중들의 무능과 오류를 지적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잘못하고 있는세상을 질타하는 등에의 역할을 자임한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가능한이데아를 제시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평등의 정의를 전파해야 한다, 보편적 지식인이 칸트의 불을 밝히며 왕 앞에서 걷는 시녀 역할을 하든가, 헤겔의 해가 져야만 날개를 퍼득이는 미네르바가 되든가, 시대의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역할을 하든가, 샤르트르, 푸코 또는 사이드들이 제시하는 다양한지식인상들에 따르든가, 아니면 그 모든 다양한 역할을 모두수행하는 정의로운 열정의 지식인이 되든가 이다. 이쯤에서 푸코가 추천하는 지식인의 옛 기능에도 귀기울여 보자, 미래에 일어날 사태를 예측하는 예언자적 기능, 진리와 선을 제시하면서 자신을 따르게 하는 입법적 기능과 더불어 유태 현인의 역할들 말이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수단으로서 실천하는...

 

오늘날 세계화. 정보화 속에서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대사회의 지식인은 보편적 진리의 대변자로서, 진리와 정진선미에 천착하며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대한 소명(vocation) 의식을 지닌 식자들로서 대의를 향한 헌신의 열정이라는 자질을 키워야 한다. 소명의식, 책임윤리 없는영혼 없는seelenlos’ 전문가적 식자들은 때로는 자신의 사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이기심의 추구가 사회적 해악이며, 때로는 자신의 행위가 공익에 위배되는지를 인식조차 못한다.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려는 과학적·학문적 충동과 더불어 공동체와 인류의 이상을 옹호하며 이상과 가치에 헌신하고 그 실현에 투신하는 실천적 지식인은 필요와 욕구의 체계적 지식을 구비한 배부른 쁘띠 전문 직업인과 식자와 구분되어, 올바른 사회라면, 그들의 흔한존재가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에서 내면적 윤리로 무장된 실천적 보편적 지식인을 기대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지식인의 보편성과 소명개념은 바람직하나 사회적 토대가 너무 척박하므로. 지식 보상을 갈구하고 돈과 시장논리가 한국 대학 사회에 광범위하게 팽배한데, 한국 지식인에게 내면화 된 실천윤리를 기대한다는 것은 과하다. 절대적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공공선에 투신하라는 기대는 기실 어려운 것이다.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이상적인 한국 지식인의 출현 역시 기대되기 어렵다. 학자, 의사, 법률가등 보상적 생활 도구로서의 전문적 직업에 종사하는 식자들에게서, 권력과 금력, 여론, 연고주의로부터 사회의 통념이나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그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우며 사사로운 직능개념을 넘어선 신념-, 책임윤리의 한국 지식인상, 사회의 지배적 관념,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지 않고 사회에 깊이 관여하고 개입하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관찰자로서 정오선악에 대해 행동의 담론을 재현하며 이성적, 합리적 판단을 통한 보편적 지식인의 심판관으로서의 기대는 사치이다.

 

그런데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보편적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수요가 증대된다는 상황을 의미한다. 시대의 모순을 가장 예리하게 느끼는 지식인은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정의와 양심과 현실적 부조리의 한 가운데서 기존 세력이거나 권력이 지닌 자기 방어의 본성과 충돌하는 지식인은, 그러므로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개인의 행복과 공적 윤리를 연결해주는 안정적인 매개를 굳이 찾자면, 스스로가 부여하는 소명의식self-vocation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전락해 버린 오늘날의 지식인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며. 지식인의 현존과 역할을 새삼 궁리, 제시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왈가왈부하는 비판적 보편적 지식인의 고귀한 존재론을 펼쳐 보았다. 21세기 초반 5반세기는 보이지 않는 악invisible evil, 광기의 사회악이 판치는 페이크 시대였다, 그에 매스컴의 역기능이 톡톡히 한 몫 했다. 그리하여 이 천박한 fake 시대에는, 300년 전에 빛나던 고귀한 ‘18세기계몽 지식인의 소명召命마저 소환해야 될 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도덕 무정부 사회’, ‘광기의 집단 사회악참견·고발하는개인주의적 보편적 지식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