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뺨‘을 가진 야수-코로나 대공황 Corona Great Depression:CGP’과 ’코로나 효과corona effect’, 홉스적 ‘생존권' 국가, 선거압승의 붉은 열매를 따먹다.
2020년 봄에 한반도에는 ‘국가’가 있었다,
21세기 새로운 디케이드가 시작되는 연초에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코로나 19의 방역 과정에서 중요한 시민권인 교육권을 중단시키고, 종교의 집단행동 등을 금지시켰고, 국민의 신체에 제한을 가하여 감염자 일부는 격리시키며, 그 명령을 어겼을 경우, 외국인의 경우는 추방을, 내국인의 경우는 벌금을 가함으로써, ‘강제하는’ 국가의 존재감을 국민들에게 인지케 하였다. 평시 국가의 바디는 추상으로서 보이지 않는데, 올해 특히 3월부터는 국가의 손과 발을, 국가의 목소리와 이미지가 보였다. 그 결과 유럽이나 미국과 비교적으로 효율적인 방역 성과를 올려,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내국민들로부터는 4,15 총선의 여당 압승의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선거 당일 출구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75%가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매우 잘하고 있거나(29.2%) 잘하고 있는 것(44.9%)으로 유권자의 대부분인 75%가 호평하였다. 얼마 전, ‘국민의 65%가 이번 정부의 방역 활동을 보니, 우리나라가 선진국인 줄로 느낀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보도된다. 코로나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감을 느꼈던 한국민들은 국가의 효능감, 정치적 효능감을 향유했고, 그것은 한국의 선거 역사상 높은 투표율인 66,2%에 더불어 민주당이 180석으로 압승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국가가 있어 좋았다’. 좀더 농밀하게 표하면, ‘조국祖國이 있어 안심했다’고 국민들은 느꼈을 것이다. 매년 유독 우리나라에서 ‘잔인하다’ 소문났던 4월이었으나, 올해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불안 아닌 안도감에 요즘 자연이 벌이는 봄의 제전을 즐기려는 상춘객들이 ‘밖으로’ 나돈다. 한국을 떠났던(?) 국외 교민들까지 ‘생존하기 위하여’ 서둘러 ‘자국민의 생존 보장을 위해 분투하는’ 조국으로 돌아오는 일도 벌어졌다. 한국민들의 안심 귀국 반응을 보면서, 문정부는 어떤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다. 필자가 자국민의 ‘생존 first’에 목표를 두고 국민을 통제하는 국가의 ‘강제적’ 기능을 보니, 17세기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제시한 인민들로 부터 ‘외경심에 떨게 하는’, ‘강제’라는 폭력의 전권’을 행사하는’ ‘생존권 국가’ 리바이어든을 떠올랐다.
홉스는 근대국가 설립의 기원을 도출해 내기 위하여, 인간 본성으로부터 분석을 시도하는데, 국가라는 존재가 아직 없던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를 가정하고, 이 아나키 상태 하에서 인간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War of all against all)’을 벌이며 목숨 걸고 싸우는 싸움꾼 인간들을 상정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왜 그렇게 싸울까.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신적, 신체적, 능력이 평등하고, 인간들의 이 평등성equality은 권력, 이익등을 향한 <욕망의 평등>을 낳게 된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서 이기적 목적 달성을 위해 분투하는 (자연 상태하) 인간들은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홉스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경쟁(competition), 불신(diffidence), 공명심(glory)을 그 싸움의 3가지 요인으로 꼽았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에서 분쟁적인 인간 본성의 요인으로 안전security 이익interest 명예(honor)의 추구를 꼽았는데, 다소 유사한 것은 홉스가 앵글로 색슨족 중에서 최초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홉스가 보기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을 벌이는 싸움꾼 인간들‘을 규제하고 조정하여 정글상태인 자연 상태를 극복하고, 인간들의 생존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대내적 중앙 정부가 필요하고, 그것이 ‘라바이어든적 국가’ 설립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홉스의 리바이어든은 자애롭지 않다, 홉스의 ‘괴물 리바이어든’의 국가 유비는 국가의 속성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지상에 더 힘 센 사람이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Non est potestas Super Terram quae Comparetus ei)”라고 적힌 <<리바이어든>>의 표지어는 국가의 전제권력을 표상하며, ‘지상의 신’으로서의 모든 힘과 의지를 단일 인격에 집결시켜 절대 국가적이다.
자기보존의 자연권을 지녔으되, 인간들 모두가 자신의 자연권을 주장하며 욕망을 두고서 목숨 걸고 싸우니, 정글의 자연상태의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고, 더 효과적인 자기 보존을 위해 ‘리바이어던’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거의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게 했지만, 그러나 리바이어든 야수는 무한대의 권력도 무한대의 시간을 통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백성들과 국가는 ‘계약’과 ‘동의’를 통해 리바이어든을 탄생되었고. 천부적 권력도 왕권신수설도 부정하는 홉스의 리바이어든에게 권력이 일시적으로 한계적으로 위임되었기 때문.
백성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리바이어던에게 전제군주적 권능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생존보장을 기대하고(약속받고), 그의 통치를 수용하며 그에게 복종한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계약’이니 복종의 동의의 철회가 가능하다. <<리바이어던>>의 제21장에서 홉스는, ‘통치자 리바이어든에 대한 백성의 복종 의무는 통치자가 지속적으로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홉스의 이 생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여,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와 그 지도자는 ‘국민 보호’ 불능으로 간주되어 민주국가에서는 선거등으로서 심판을 받게 되고, 독재국가는 전복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홉스의 계약설에 따라서 백성은 국가라는 기구의 원초적 창립자가 되고, 하나의 인격체 즉 ‘인공인간(artificial man)’인 리바이어든 국가 행위자와 개인들은 서로를 구속하게 된다. 인간들의 목숨거는 투쟁 행위를 조정, 통제하여 개개인의 생존을 보장해 주고,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고, 나아가 인간 공동체의 번영의 목적으로 태어난 국가 리바이어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공 바디 artificial body’인 리바이어던은, 21세기에는 코로나19를 대면해, 백성을 향하여 명령을 내리고, 그들은 이에 복종해야만 하고 만일 복종하지 않을 시, 신체적 혹은 물질적 구속을 당하니, 실로 그의 “외경스러운 존재”를 드러내었다.
리바이어든은 야수이므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필요시에 시민의 기본권에 제한을 가하여 개인들의 자유를 구속시키는 강제를 실행한다. 작금에 대한민국은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여 ‘감시국가’가 되었고, 입국 시민들을 2주간 따로 격리시키며 개인의 신체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한정하였고, 평시에 자유로운 종교의 집단 행사를 금지시킨다. 중국·싱가포르·대만은 외국민 진입을 금지하는 봉쇄 조치를 일치감치 단행한다, 애인과 부부의 사생활도 간섭하는 ’2m 사회적 거리두기’애서 보듯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국가는 시민의 안방 침대까지 ‘간섭하며’ ‘권위주의적’으로 행위한다.
정부의 국민 기본권 일시 제한에 시민들의 온순한 복종의 피드백은 효력이 있어, 한국을 포함 아시아 국가들의 방역 성적표는 좋았다. 재난에 맞서 국민보호를 제1의 목표로 삼은 신속성, 능동성, 개방적 단기적 기본권 제한을 가한 국가로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2020년 한국과 대만의 야수국가는 긍정적 의미에서 민주적 야수였다, 자칫 ‘코로나 대공황 Corona Great Depression:CGP’에 빠져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과 사회심리적 패닉상황을 불러 올 수 도 있었을 바이러스 펜데믹을 막고, 예상된 묵시록적 ’코로나 효과corona effect‘는 미미하게 잦아든다. 이 민주적 리바이어든은 재난 와중에 치루어진 전국 규모의 총선에서 선거압승을 선물하는’시민의 ‘반응‘에 미소지었을 터.
2020년처럼,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직 방역의 목적을 위해 국민의 이동 자유권등 기본권을 제한하는 통제를 가하며 5000만 국민의 생존과 건강을 살피며, 공공안녕과 질서를 추구하고, ‘재난지원금’이란 급성akut 복지 배려는 능동적으로 활약하고 개입하여 국민의 생존과 안녕과 번영의 미래를 추구한다면 이런 나라를 우리는 ‘푸른 뺨을 가진 야수로 칭해도 되겠다.
때로 ‘붉은 뺨’을 가진 국가도 보인다. 국정수행 과정에서 가끔 드러나듯, 정책의 결과가 예상치 않게 잘못되었을 때나, 의도는 그렇지 않았으나 결과가 아주 폭력적이거나, 인류해악적이거나, 또는 권력의 부정부패가 밝혀졌을 때, 야수 국가는 자국민에 대하여 또는 세계에 대하여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알고 그것을 표시하는 나라여야 한다, 전후 독일처럼 말이다, 전쟁 발발과 전쟁 악행을 깊이 사과하고 반성하는 붉은 뺌을 가진 국가여야 한다.
최근년에 거국적, 지구적 재난에 맞서 능동 대응하며 국민의 생존률을 높이려는 선good한 푸른 뺨의 국가도 있지만, 국가의 구두 발길이 국민의 안방까지 쳐들어가는 심각한 ‘전체주의적 감시국가가 보인다, 중공은 이미 코로나의 펜데믹 이전에 디지털 전체주의이다. 13억 전 인민에 등급을 매겨 감시중인 중공 공산당의 인공지능 폐쇄회로 카메라는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사생활 동선을 수집한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696790 중국의 지하철 역에는 인민 안면 인식기 설치와 통제는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 국가이다, 올해 안에 골목 곳곳에 4억개가 설치되어 14억 얼굴을 3초에 파악하기를 벼르는 cctv. 동네마다 둥둥 떠있는 안면인식 드론기, 중공 공산당은 인민들 휴대폰은 시민 개개인의 얼굴인식은 물론, 체온, 신체적·감정적 상태에 관한 생체정보 데이터를 저장, 감시한다. 전쟁이나 테러, 공포로써 인민들을 지배했던 20세기의 전체주의와는 다르게, 21세기 중공 디지털 전체주의는 인간을 유전공학적 존재로 규정하며 AI, 4차 산업혁명이라는 과학기술 요소를 ’중국특색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접목, 감시체계를 강화, 13억 중공 인구는 물론 나아가 세계지배의 야욕을 꾀하고 있다, 이들 디지털 독재국가는 음울한 회색 뺨을 가진 야수이다.
중국의 디지털 전체주의는 권위주의를 넘는다, 데이터 생산과 유통, 저장의 독점을 통해서 인간 행동을 규제, 통제하는 수단을 지배하고, 위계적 행정조직을 통해 13억 인민을 감시하는 중국의 디지털 전체주의는 중국 인민들을 개인정보망 안에 연결시켜 가두어 팝옵티콘 적으로 상시적으로 효율적으로 통제한다. 시민들을 원자화시키고 분리함으로써 공산당 일당 독재 권력에 대한 도전을 미리 차단하려 한다.
재난시 ‘국민의 안전’을 퍼스트로 도모하는 홉스의 생존국가 리바이어든은 싸움꾼 인간과 동물이 득실거리는 무정부 자연상태의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려는 목적으로 계약을 통해 설립된 국가이니, 홉스의 국가론은 결국 국가의 제 1책무는 인민들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안전을 도모하는 신체와 목숨보전의 생존국가’인 것이다. 홉스의 이 ‘생존 안전보장 국가론’은 400여년이 흘러, 느닷없이 코로나 19에 의해, 대한민국 국가가 그 기능을 선연하게 수행하였다. 올 초봄에 관건은 경제보다 앞서는 목숨 (생존)이었던 것이다. ‘푸른 뺨을 가진 대한민국’은 능동적으로 국민의 안전을 위해 활약하는 민주적 리바이어든이었다.
이번 코로나의 전지구적 신속한 확산은 시대적이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 ‘세계화’와 ’첨단 기술‘발달의 덕분이란 말이다. 편리한 교통은 재빠른 병원체 수송망이 된다. 인류의 기술개발이 가져온 항공과 기차, 자동차 등 교통수단은 모두 빠르고 편안하고 효율적인 바이러스의 수송망이다. 지구 구서구석을 넘나드는 펜데믹 바이러스의 자유주의는 시공을 초월하여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신자유주의의 초국적 자본을 연상시키며 맘껏 세상을 활보하였고, 인간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코로나는 민주적이다,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 빈부. 남녀노소를 차별없이 균질하게 다가와 남녀가리지 않고 신체에 침투하여 탈중심화와 평등주의를 구현하였다. 지구적 차원에서 공격하고 증식하고 확산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종주의도 모른다. 뉴욕 호랑이조차 감염되며 인간에게도 무차별 침투하여 만물의 영장 체면을 구긴다. 유럽에서는 세계화, 자유무역, 자유왕래라는 어제의 善이 오늘의 난관으로 변신하여, 코로나 확산의 원인이 되니, 유럽통합의 이상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지 EU의 심사를 흔들고 있다. 실로 전 지구적 현대인의 생활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손아귀에 농락당했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맹공격하는 바이러스 펜데믹에 지구는 마치 하나의 공ball처럼 유사하게 행동한다. 지구인들은 모두 죽음의 혹은 최소한 감염의 불안과 공포에 떨며,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반쯤 가려서, 미학에 훼손을 가하고 인간들끼리의 소소한 소통을 방해한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유럽연합의 국경은 봉쇄되고, 평소 자유주의적 시민들이건만 국가가 지시하는 비자유적 ’사회적 거리두기‘에 온순하게 복종하고, 집권의 정당성을 유지하려는 각국의 정권들은 모두 천문학적 돈을 뿌려 안감힘을 다해 경제를 붙잡아 집권 유지에 힘을 쓴다. 이러니 개별국가들은 마치 하나의 국가처럼, 코로나 대응 방법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유사한 행동을 취한 것이다, 이 유사한 행위는 단순한 국가 속성을 보이는 당구공 국가들처럼 보인다,
지구의 시장은 하나로서 위계적 기능을 주장하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처럼 이번에 전지구의 200개 넘는 국가들의 시장이 마치 ’하나‘인 듯 ’코로나 때문에 경제가 폭망 중이고 저성장은 물론 실업자의 수와, 고용불안은 천지를 찌르며, 불만한 시민들이 거리에서 데모를 한다. 이런 점에서 시장만이 아니라, 200개 넘는 ‘지구 국가들 전체’가 마치 하나의 국가처럼 ‘코로나 펜데믹’ 변수에 유사한 행위와 유사한 국가적 고통을 당하고 표한다, 주권국가나 민족사회가 아닌 ‘세계국가 체제’가 사회과학의 분석단위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자들에게는 ‘주권국가’가 분석단위인데, 이제 ‘세계국가 체제’가 하나의 단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일으킨다.
지구가 카오스다. 특히 미국이 그렇고 그중에서도 뉴욕이 그렇다, 매스컴을 통해 보여지는 뉴욕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70억 인류가 재난을 ‘함께’ ‘동시에’ 겪는 와중에, 일개 전염병이 그것도 보이지도 않는 쬐끄만 버러지놈들이 내로라 모든 최신 거대 첨단 철제 신무기로 무장한 강대국들을 한방에 공격하면서. 문명 세계를 아비규환으로 초토화 중이니.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개념들’이 떠오른다.
1929년 서구사회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대공황처럼, 이번 대대적인 펜데믹 사태는 끔찍한 코로나 대공황 corona ’의 ’코로나 효과corona effect‘로 불러도 되겠다, 코로나 효과란,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가 한번 날개를 접었다 폈는데, 지구 반대편 뉴욕에서는 거대한 태풍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 있다는 1997년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초의 기후 변화 관찰이지만, 2020년 ’코로나 효과corona effect‘는 전지구적 정치,경제,사회의 변화를 몰고오는 폭풍같은 사회과학적 변화를 낳는 효과이다.
중국에서 발원한 초기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주 간단하게 사람 몸에 붙어서 비행기를 타고서 시공을 초월하여 광속으로 확산되어, 코로나19는 순식간에 뉴욕으로 날아가서 감영자와 사망자를 속출시키며 문명 뉴요커들을, 야만의 사상死相으로 내몰고, 인도에서는 처참하게 배급식품을 기다리는 사회경제적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베이징의 바이러스는 한번 꿈틀댔을 뿐인데도, 지구 저편 뉴욕에서 이른바 펜데믹의 토네이도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이리하여 코로나는 21세기 들어 ‘생사’의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하품하던 그 야수를 불러내었다, 한때 ‘국가의 종말’을 예고하며 쇠약해져 가던 ‘국가 능력’을 부활시킨다. 이제 21세기 국가는 제대로 보여줄 역할이 생겼다. 대내적으로 오직 ‘국가’가 선봉에 서서 시민사회를 통제하며 수행할 수 있는 역할 말이다, 생존권에 묶여있기로는 자연시대의 인간이나 현대의 인간이나 그 조건이 유사하여, 파스칼의 진리를 소환하자면, 인간은 물 한방울이 모자라서 멸종될 수 있는 연약한 생물이니, 국가가 적극 어쩌면 강제적으로라도 나서서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베이징 ‘코로나 대공황CGD’은 뉴욕에서 ‘코로나 재앙 효과’를 불러 일으켜 기존 세계질서의 주도국 미국의 힘을 쏙 빼놓는 예언적 알레고리는 아닐지, 아니면 부상하는 중국의 힘을 쇠락케 하여 향후 미중 패권 전쟁의 전개의 양상이 知的 궁금증을 일으킨다. .
때로 복잡한 우리의 우주에는 어떤 징조도 징후도 없이 다가와 우리의 평온한 일상계를 흔드는 일이 발생하는데, 2020년대 연초에 홀연히 들이닥친 코로나19는 복잡계이론complex system theory을 떠올린다.
수세기 동안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의 인식론적 기반을 이루어 왔던 뉴턴식 기계론적 세계관은 변수들 사이의 선형 인과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한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그 물체의 동적 궤도를 완전하게 계산해 낼 수 있다는 단순한 결정론determinism. 따라서 현상의 모수 값만 안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변수를 적용 예측의 함수를 그래프로 그리는 합리적 기대이론은 그러므로 합리적 예측과 추측을 추론하던 사회과학의 시선은 이즈음 예측 불허의 코로나 발생과 진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linear한 기계론적 뉴턴 관점으로는 예측이 어렵게 되었다, 코로나는 차라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Uncertainity Principle가 적용되어, 대저 앞으로 우리 앞에 세상만사는 그저 확률로서만이 기대치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인가.
열역학 법칙에서 가변적인 앤트로피는 닫힌 세계에서 증가하고 열린 곳에서 감소하여 질서를 잡는다는 명제인데, 열린 세계인 유럽엽합은 그 열림으로 인하여 질병확산의 카오스를 경험, 엔트로피 ‘확산’의 카오스를 직면 했다. 개방적인 뉴욕에서도 엔트로피의 법칙은 마찬가지로 부정된다. 엔트로피의 명제와는 달리 오히려 개방사회에서 넘쳐났던 것이다. 21세기 초에 들이닥친 코로나 대공황 corona ’. ’코로나 효과corona effect‘는 코로나 카오스Chaos의 복잡계를 선보이며 오리무중 인류의 미래를 예측 불허하게 민든다. 이제 한국에서는 코로나의 위세가 꺾이는 중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인류를 공격할지 아직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문정부의 방역 통제아래,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 19의 감영자와 사망자는 제한적인 확산을 보였다 (대만이나 싱가포르, 홍콩등 한국의 경쟁국들은 더 나은 결과를 냈지만, 유럽과 미국에 비하면 좋은 성적). 건국 이후 한국에서는 안전-, 재난 사고 상시 발생으로 고귀한 인명피해가 이만저만 많은 나라가 아니었었다
하지만 올해는 국가의 효율적인 대처로써, 70년 안전 불감증 국민의 오명을 단박에 씻고, 한국민은 데모 때마다 쇠창살 전투적 폭력 민주화 운동을 넘어, 김세린이 10년 전에 주창한 시민성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근년들어 무폭력 시위의 건전 시민으로 거듭나서 ‘무폭력 촛불 시위’를 보이더니, 푸른 뺨을 가진 야수 대한민국은 방역활동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여, 세계로부터 ‘따뜻한’ 시선을 받고 있다.
방역時 보여준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창의적인 대응과 국민들의 시민의식으로 이번 코로나 대공황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능력을 알리고, 그리하여 코로나 방역 표준을 세계무대에 제시하여 국가위상을 제고하였다. 대통령은 이 위기 속에서 한국이 세계질서를 주도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바람직한 의지이다.
그러나 국제질서는 여전히 힘이 지배하고, 변방의 잘해야 반주변부로서 다리를 걸쳤다는 한국이, 이제 세계 속의 한국이 되려는 국가의지를 품는다면, 무엇보다도 국력 향상이 필수, 대한민국의 국력이란 필시 스마트 파워여야만 한다, 하드와 소프트 파워를 겸비한 ‘매력 강대국 대한민국’의 저력이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에 전 한국민의 ‘교양 국민’화는 필수, 스마트 파워의 조건을 갖추어야만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한마디라도 할 수 있고, 작지만 ‘스마트 국가’의 발언으로서, 비로소 국제사회의 눈길과 귀를 모을 수 있다는 현실인식 하에, 민주적 리바이어든은 대한민국의 ‘국력향상’을 ‘사람 먼저’와 마찬가지로 매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푸른 뺨도 붉은 뺨도 가진 야수 ‘사자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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