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만행 이후, 나는 서정시를 쓸 수 있을까
지성과 세계관 결핍의 슬픈 헌재 재판관들, 美 연수를 떠나시오!
못됐게 모질게 독하게 죽여버릴려고 대통령 뽑았나?
등소평은 통합을 위하여 마오의 과오보다 공功을 강조했다.
“한국 헌재, 지나친 권력행사 한다”-日 요미우리 신문.
헌재의 ‘탄핵용인’은 1000만 탄핵반대 국민 의사(20%)마저 무시한 독재!
*헌재 판관들, 신생 판례 창조, 후진적 법조 예술가로 변신하다.
*매우 오래된 적폐된 돈과 권력 탐욕의 좀비 기억들이 발호하다.
아주 오래된 잊을 수없는 개인의 상실과 상처, 초라한 삶의 기억들에 사무치고, 각자 적폐된 회한의 응어리에 자기 연민의 기억의 바위 가슴 속에 새겨진 아롱진 모든 서글픔과 불만을 ‘마침 거기’ 외로히 서있는’ 여대통령에게 방사하며 난사하였다. “박 대통령이 공격 대상이 됐고“ “경쟁에서 몸부림쳐도 보상되지 않는 불만이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前 日 주한대사). ‘한번쯤 십초만 눈 감으면 ’모두가 승자되는 일’을 해내지 못하고, 독재자도 아니건만, 대통령직 모가지가 떨어지는 순간, 정상 유권자 시민이라면 착잡해야 하건만, 뛰고 솟고 환호하며 감격하며 축포 쏘며 눈물 흘리며 박수치는 군중 시민들. 이곳에서는 정의나 양심 진실같은 지상의 고급한 언어는 그 빛을 잃고 오물 냄새나는 속어로 둔갑하며, 권력과 돈 탐욕에 혈안이 된 쟁취의 수단이 되어 버린다. 저 나라는 “거짓말 공화국”이라 손가락질 하는 벌써부터 이웃나라의 평판이 과하지 않은 것 같다.
어느 겨울날 젊은 신임 독재지도자가 군부대를 시찰 후 귀가하는 배를 탔다. 남녀 군인들은 지도자만 바라보며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며 뛰고솟고 환호하며 지도자를 배웅하다가 그만 강물을 만났다. 그러나 용감한 남녀군인들은 그것을 아랑곳않고 강물에 무릎까지 빠져 군복이 젖으며 추웠지만 계속 그들은 모자를 흔들며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며 떠나가는 독재 지도자를 배웅하니 젊은 독재 지도자는 흡족해마지 않으며 미소로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사랑하기 딱 좋은 더없이 고즈넉한 가을 토요일 밤에도 고달픈 엄동설한에도 아랑곳없이 주말 밤마다. 은은한 불빛을 밝히며 농성하는 화가 치밀은 성난 시민들. 그들은 수도首都의 대로를 행진하며, 불을 올렸다 내렸다, 불빛을 껐다 켰다, 나찌의 횃불 행진을 모방하고, 지방에서는 우람한 트랙터 부대들이 수도 광화문을 향하여 밤새도록 털커덕 달리며 올라와 드르륵거리며 도시에 농민성을 덧붙히며 한껏 시위의 국민적 위용을 드높혔다. 우아한 시민들은 밤중에 여성 지도자가 기거하는 푸른집을 둥글게 촛불 장성을 만들어 에어싸며 어쌰어쌰 행진하며 민주적이고도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다. 이런 평화 의식 거창한 역동적 자랑스런 시민들의 ‘즉각탄핵’ 요구는, ‘3월의 동백꽃 모가지 탄핵’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고, 뽐내며 자랑스런 민주시민들은 그날 밤 혁명을 자축하고 축포를 수만발 쏘아 올리며 주체치 못하는 홍수 눈물로서 시민 포옹으로서 얼싸안고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박수치며 발을 구르며 뛰고 솟고 환호하였다. 무려 5개월을 치루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목표 의식적인 시위였으니, 목표 달성한 시민들의 눈물 포옹 감격은 당연한 격정의 발호일 터.
위 두 사건은 한반도에서 한민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라는 자유 체제라는 다른 체제에서 사는 사람들이건만, 보이는 현상은 지극히 유사하다. ‘자연’감정‘의 무제한 방출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사건은 김세린에게 인상을 주었다, 전자애서는 ‘사람이 아니라 인형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북한 동포가 가엾어, 그러므로 그들을 억압 독재에서 해방시켜야 하므로 통일을 ’반드시‘ ’가능하면 조속히 해내야 한다’며 눈물 한방울 흘렸고, 후자에서는 ‘우아한 시민들’의 ‘우아한 시위 행위’에 내재한 끝없는 미움, 적대감 등에 대해 절망과 환멸을 느꼈다. ‘정권 파괴’를 향한 5개월간의 대장정의 조직적 체계적인 질기고 집요한 평화 시민의 평화 시위! 아직까지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던 창의적인 현대적 시위 행태이다. 주말 밤마다 푸른집을 에어싸며 강강수월래를 만들며 어쌰어쌰 시위의 풍경화는 21세기 평화 시민 시위의 숭고미의 절정. 그에는 日軍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비견되는 ‘국모 살해’의 ‘평화적’ 상징 행위인 줄을 대개의 대중들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유사 국모 살해’를 저지르고도, 본인들도 조장자들도 아무도 모른다.
한국의 박 탄핵 과정엔 ‘자연’이 활화산되어 솟구친다. 그 자연은 정의나 진실의 중대한 훼손에서 유래하는 열혈 분노가 아니라, 오직 한 개인에 대한 주체할 길 없는 미움과 시기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이다. 이에 매스컴이 주도하고 그에 현혹당한 ‘광란 편승 공감’의 확산이 가져다 준 결과가 탄핵 용인이다. 차분한 이성의 문명이 아니라 용솟음치는 뜨거운 미움 용암의 폭발의 미개 현상이다. 법치주의, 민주주의라는 고상한 이념적 언어의 포장지로 위장된 저급의 미개한 감정 표출이란 말이다. 이곳에서는 이런 쓰나미적 자연 현상이 처음은 아니다. 5000년 고래의 분열과 대립으로 얼룩진 통상적 한민족 기질일거다. 노무현대통령 때도 그렇다. 자당自黨에 편드는 조그만 발언 했다고 무슨 법 위반을 들이대어 탄핵시킬 궁리를 했으니. 그 첫 실패 후, 12년 후 이번엔 ‘죽어도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노련미는 마침내 성공했다. 이번 ‘정권 파괴’라는 목표를 두고 밀어붙히는 조직적 체계적 프로그래밍 시위 행사는 얼마나 유능한가. 세계 1등이다. 수출해야 한다. 유럽으로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야만이다. 나는 야만을 보았다. 붉은 동백꽃 되어 툭 떨어지는 여대통령의 모가지를 보고야 말겠다는 그 분기탱천, 내가 요 몇 달 사이에 본 것은 허구의 혁명 영화도 아니고 실체적 만행, 한 여성 대통령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과 광기가 저지르는 만행,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보았다. 이제 떨어진 그 모가지에는 1000만 탄핵 반대자들(20%)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8대 0이라는 판관들의 선고는, 일반적 수학적 확률이 허용되지 않는,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다. ‘과연 피청구인 박근혜의 범죄는 재판관 100% 동의를 촉발할 정도로 그토록 중대하고도 선명했단’ 말인가. 튼튼한 30살 민주주의를 더 강하게 하겠다고 민주주의의 제단에 삶아서 잘려져 놓인 돼지목처럼 여대통령직 모가지 제물을 바치는 행위...그렇게 모질고도 독하게 반쯤 죽여놓을려고 대통령 뽑았나.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며 외신들도 칭송했고, 보수 진보 구분없이 어울린 국내 매체들은 일심동체인 듯 ’한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승리‘ ’시민의 힘‘, ’광장의 힘‘으로 ’힘 힘‘ 요약하며 헌재의 ’박 탄핵인용‘을 지고의 수사로써 찬양하며 반기며 스스로 감격해 한다. 매스컴은 ’언론의 힘‘ ’언론의 역할‘이라며 자신들의 폭로 행위를 스스로 대견해 하며 이 탄핵 분위기를 즐기며, 힘빠진 피의자 ’민간인‘ 박이 제 주제를 모르고서 아직도 ’진실‘ 타령한다며 준엄히 꾸짖는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언론까지 나서서, 한국의 탄핵사태를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로 칭송하건만, 나는 한 순간에 떨어져 나뒹구는 못다 핀 동백꽃 ’여대통령의 모가지‘를 보았으니, 그 느낌 섬뜩하고, 한국인들에게 풍부한 광란과 분기탱천과 독기에 환멸과 몸서리를 친다.
그렇다 나는 분명히 야만을 보았다. 내가 그동안 4개월여 관찰한 이 사태는 적어도, 아무리 잘 보아 주려 해도, 한국인의 조급하고도 포악한 야만성이 창조한 미저리(재앙 misery)다. 머나먼 아프리카 미개국 우간다나 남미 부패지수 드높은 정치 후진국 브라질에서나 일어나는 ‘제례’일지언정, 세상에서 좀 나간다는 OECD 국들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 시끄런 ‘국론분열’ 경쟁이라면 한국과 막상막하인 터키에서도, 작년말 쿠데타는 일어날지언정 탄핵은 없었다. 이번에 한국이 최초로 OECD 국가들 중에서 탄핵대통령을 탄생시키는 창조적 기염을 토했다. 삼류들과 비슷한 행동과 결정을 해대니, 그들은 삼류들임에 틀림없다.
잘 살펴보면, 탄핵 용인에 반대하는 국민이 참 많다. 1000만이 넘는다. 3월 10일 선고 이전 가장 최근 여론 조사에서 78%는 탄핵 찬성, 20%는 반대였으니, 줄잡아 약 1000만 이상이 ‘탄핵 반대자들’이다. 한국 갤럽에서 2017,3,3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중 77%가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고, 18%는 반대. 리얼미터 3월 8일 여론 조사는 탄핵 찬반 최종 여론조사는 朴대통령 탄핵 찬성 76.9% vs 반대 20.3%였다. 이로 보건대 보수적으로 잡아도 탄핵 반대 국민들은 1000만 정도인 거다. 탄핵찬성 78% 찬성자들조차도 3/4이 대중 매스컴의 압도적 영향에 현혹당했을 것이니, 3000만 국민은 온건할 것, 그러므로 약 1000만 정도만 ‘광적’ 탄핵 찬성일 터, 결국 ‘탄핵 찬반의 비율은 1대 1정도로 잡아도 될 듯하다. 나머지 3000만 국민은 시간이 지나면 주술적 탄핵 광기의 기운에서 풀려 나올 거다.
현재 탄핵반대자들인 국민의 20%인 1000만명은 묵묵히 침묵한다. 한국에서는, 필자를 비롯, 이 탄핵 판결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표츌하는 이는 극소수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이웃나라 언론에서 깨끗한 ’공감‘과 ’동의‘를 발견했다. 나와 똑 같은 ’정확한‘ ’소수 평가‘를 개진하였으니 놀랐던 것. 日 산케이 신문이 "박근혜 탄핵은 좌파·야당의 정권탈취 시도"라며 "한국 국회 탄핵소추안 증거자료 21건 중 16건이 언론보도란 사실에 경악"했다는 전언이다. 유쾌하게도, 정작 내 생각과 ’딱‘ 일치하는 평가를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대변했다, ‘한국의 헌재가 지나치게 권력 행사를 한다’. 사족하자면 산케이신문의 ‘박대통령 우호’는 기이할 정도, 왜냐면 몇 년전 박근혜대통령이 ’7시간 동안 연애했다‘고 망발한 그 신문, 박통의 ’벌‘까지 받았던...이 두어개 일본 언론들의 ’남다른‘ 정확한 논평이 반갑다.
삼월의 만행은 끝났다. 참수된 못다 핀 동벡꽃 대통령 모가지‘는 복원 불가하다. 그렇다 판결은 끝났다. 탈취된 대통령직織을 주인은 회수 불가하다. 동시에 국민 20%인 다수 1000만人 탄핵 반대의 소망도 거꾸러졌다. 헌법 재판의 정치성을 감안하면, 1000만의 반대하는 인민의 의사는 ‘죽은 개’처럼 시궁창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3월 10일 여대통령직 모가지를 내려친 도끼의 날에서는 세상사 화두인 권력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고래의 고질적 한민족의 악성인 극미움과 극적대의 야만성이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독기가 서려있다, 돌처럼 딱딱할 판결문에서조차, 판관들이라면 피해야 할 자연인, 노기가 느껴진다. 대통령과 1000만 국민의 의사의 반영이 티끌만큼도 스며있지 않고, 판관들 스스로의 안전만 챙긴, 이들의 8대0의 선고는 필자에게 마침내 ‘이건 아우슈비츠의 학살’이라는 감정을 일으켰다.
8대 0이라는 탄핵용인 판결의 전체주의는 탄핵이라는 8개 창에 0은 무적의 방패가 된다. 피청구인 대통령과 1000만 인민의 입을 아예 다물게 한다. 8대 0이란 소박한 국민의 반발이나 의문의 입술조차 봉쇄시키며 차단하는 바윗돌 무기막지의 방탄정치다. 이 판결은 ‘틈’을 주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꽉 잠가두었다. 하지만 판결이 내재한 재현한 부당함과 권위주의의 냄새는, 안일한 우리를 몇자 끄적이게 한다.
탄핵 정국동안 필자는 87체제 5년 단임 보장, 대통령 잔혹사 마감, 겨우 7개월 임기 만료를 두고서 형식미를 갖춘, 정치 미학으로 ‘정상적으로’ 대통령을 보내드리자고 강변했다. 그러면 ‘동시대인인 우리가 자랑스러워진다. 그런 후 정치사회 개혁하면 된다. 대통령제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여지껏 대통령 탄핵 선례가 없다. 더구나 이번 탄핵 사유의 불명확성과 절차의 미비성은 각하를 요한다’등을 강조하며, 하지만 목석으로 우석으로 끄떡없는 자들은 무기막지했다.
헌재의 판결문에 의하면, 이번 ‘결정적’ 탄핵용인 사유는 세 개의 원천을 가진다.
첫째, 최가 인사 개입등 국정농단을 했고‘대통령이 최의 이익을 위해 관여했으니 국민 신임을 배반했다는 것. 최의 국정농단 인사권 개입은 죄다. 이 사유를 필자는 포용하자고 강변했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집권 시절의 소통령이나 홍삼트리오는 인사권, 이익 개입 없었나? 4% 밑바닥 지지등등, 이들의 어수선한 국민 신임 배반을 기억해 보라. ’이 신임 배반 잣대에 견주어‘ 역대 어느 대통령도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지 않은 이 나라 대통령 있나...
재단이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는 것도 그렇다. 대통령이 사인 최의 이익을 위하여 관여, 개입, 방조했다지만, 재단은 취지는 문화융성의 의도였고, 그 금액을 높이기 위해서 대통령이 기업인들과 독대를 했고, 모금 돈은 재단에 돈이 그대로 있다, 이전에 노무현대통령은 기업인들에게서 수천억을 모금했다고 한다. 이처럼 당시까지 관행이라 박은 그렇게 한 것인데, 이 모금 행위가 ‘기업의 경제권을 침해했다며, 헌재는 탄핵이라는 추상같은 단칼을 내려친다. 꼭이 모가지를 잘라야 했을까. 판관들은 미국 군산복합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
둘째, 대통령이 ‘헌법수호의 의지가 안보인다는 거다. 대통령이 검찰 조사도 안받고 청와대 압수수색 거부가 그 방증이란다. 이는 부당한 판결이다, 오히려 헌법재판소의 책임이다. 헌재가재판 날짜를 임의로 지정하여 서둘렀다. 대통령의 헌법수호의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대통령이 검찰조사를 안받은 이유는 바로 이정미 대행 때문이다. 자신이 3,13 퇴임하니, 시간을 계속 재촉하며, 피청구인들에게 꼭 필요한 변론기간조차 충분히 주지 않았던 것. 분명한 것은 대통령이 검찰조사를 받지않은 이유는 양방이 날짜와 시간등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만일 3,13날짜 제한만 재촉하지 않았더라도, 대통령은 조만간 검찰 수사를 받았을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오히려 위계적 상위의 대통령에게 날짜 지시를 하는 이 對박대통령 권위주의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국민 여론이 든든한 빽? ‘
청와대 압수수색 거부도 그렇다. 물론 대통령이 청와대 압수수색이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검찰이 처음에 거부당한 후 청와대 압수수색을 재시도 하려고, 법원에 행정 명령권을 부탁했을 때, 법원이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헌재의 판관들은 법원의 ‘금지’ 행정명령을 존중해야 할 일이지, 박대통령의 헌법수호의지의 부재를 지적하며 날도끼질을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점은 결국 헌재의 오판인 것이다. 혹시 의도된 오판은 아닐까.
셋째, 다시는 정치 페습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박근혜는 대통령이라 영향력이 크므로, 이번 ‘탄핵 옹인’ 판결을 내림으로써 ‘얻는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므로’, 헌재는‘용인’ 판결을 내린다고 했다. .
이에 우리는 단박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박대통령이 한국 법치의 제물이 되어야 하나?’ 또한 ‘범죄란 현행범에 관한 것이지, ’당장 사형당하는 사형수‘가 공동체의 미래까지 책임져야 하나? 이다, 사형수의 기본권 인권은 무시되고 공동체의 대의를 위해 죽어주어야 하나? 독일 헌법재판소가 다루는 사안들은 90%이상이 ’개인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 대통령이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는 이 판결문은 논의의 여지를 남긴다 (이는 나는 법률가가 아니므로 상식선에서의 생각이고, 이 생각의 정오의 여부를 탐구해 보지 않았다).
세상에서 법보다 우위인 것으로 말해지는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피청구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질량에 의해서만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 같다. 미래의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향상을 위해, ‘피청구인이 대통령이라는 公人이므로, 소추된 김에 이참에 대통령직 모가지를 잘라버려야 하나?’ 한국 법치주의는 그토록 박대통령의 모가지의 피를 필요로 해야만 발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피의 색깔이고 피의 비린내가 진동한다.
필자의 평가로는 이미 박은 한국 법치주의 향상을 위한 댓가를 다 치루었다. 그는 탄핵 소추를 당하여 '하릴없는 한담' 매스컴을 통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 최악의 갖은 모욕을 다 당하였다. 박이 당하는 모욕을 보면서 대통령 직을 꿈꾸는 자들은 모두 한 수 배웠을 것이다. 그것으로 학습효과는 충분했다. 그런데 한국 판관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꼭이 한국 법치주의 제단에 제물로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공인 대통령’ 이전에 박근혜는 고유하며 양도 불가하며 침해를 허용치 않는 천부적 인권을 가진 한 개인이건만. 그러나 현 대통령이기에 그는 미래 한국의 법치주의의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지는 의문스럽다.
나는 위에서 박근혜대통령 탄핵의 결정적인 3가지 사유의 타당성을 짚어 보았다. 한국 헌재 재판관들이 이런 식으로 ‘신임 배반’ ‘기업 재산권 피해’ ‘헌법 수호’‘의 명분을 들이대며, 탄핵을 하자면, 그 그물에 걸리지 않을 한국 대통령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유독 박근혜 대통령만 ’동백꽃 참수‘ 당했다. 반대 의시를 가졌고, 그것을 표출한 1000만 시민의 마음도 함게 참수당했다. 2017 삼월, 수많은 동백꽃 목들이 땅에 떨어져 뒹굴며 울고 있다. 오직 박근혜대통령만이 탄핵의 날도끼를 받았고 그이의 대통령직 모가지는 잘려 풍년제 풍어제 돼지모가지 같다. 한국 헌법재판소의 희귀한 판례 창조성 덕분이다.
이번 한국 헌재가 내린, 세상에서 ‘나홀로’ 내리치는, 일체의 ‘실수’를 용납않는 미시적 엄격성의 헌법 칼날의 그물을 들이대면 미국, 프랑스, 한국등 대통령제하에서 탄핵당하지 않을 대통령 없다. 얼마전 ’군사기밀 누설‘로 탄핵 물의를 빚었던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나, 2003년 ’대량살상무기도 없는 이라크‘를 거짓 정보를 근거하며 침공하여, 전쟁을 벌여 수백만 난민은 물론 이라크인들 10만 이상을 살해하고, 자국 미국 어린 병사 4400명이 전사시킨 장본인 대통령이건만 탄핵은 물론 그 소추조차도 당하지 않았다.
이번 탄핵 사태와 관련, 필자의 소견은 그랬다, 우리는 대한민국 대통령 잔혹사를 끝내자, 박통을 ‘실수를 포용하여’ 겨우 7개월 잔여 임기를 채운 후 ‘정상적으로’ 보내드리자‘ 였다. 이 나의 소망과 국민 1000만의 대통령 탄핵을 반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 국민들은 태극기를 들고서 거리로 뛰쳐나가- 이들은 아마 평생 데모 한번 안한 사람들일 텐데- 주말마다 시위를 벌였는데도, 매주 100만을 헤아리며 그 수가 점점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발을 동동구르며 선고 날짜를 재촉하며1000만 국민 의사는 완전 묵살되었다. 8대 0은 인왕산 바위처럼, 망치를 두드릴 엄두조차 빼앗는 무적의 확고한 숫자 배열로써 말이다.
재판관의 ’법과 양심‘이란 의심받는다. 오늘날 ’법실증주의‘는 ’법사실주의‘에게 더 큰 설득력을 내어주고 있다. 한국의 판관들은 2017년 3월에 ’사법 적극주의‘로서, 그 옛날 알렉산더 해밀턴이 평가한 입법부, 행정부에 비해 ‘가장 약한 부(theh least dangerous branch’로서의 사법부의 초라함(?)은 끝났다, 1500만표 이상의 민주 대통령까지도 단 한 칼에 싹뚝 참수할 권능을 지닌 ‘가장 쎈’’ 부로 재탄생(?)한 것 같다.
보통법계common law인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학자들에 따르면, 1차적 법원은 동일 또는 유사한 법적 분쟁에 관한 법원의 판례이며, 선례구속의 원칙이 적용된다. 이는 전통적으로 판사의 법적 판단은 보편적 법원칙과 양심, 구체적 선례에 의해 구속이 된다고들 전해져, 인민들로부터는 ‘판사의 판결이 법과 양심으로만 짜여진 순결한 신비로움’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다른 이론들이 있다. 실제로는 보편적 법 원칙이란 것이 불분명하고, 선례를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판사의 주관적 결단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기계적 추론만을 상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판사의 판결이란, ‘양심과 법으로 위장된 법관의 정치행위’라는 법사실주의는, 이번 대통령 판결의 배경일 개연성이 높다. 지금껏 美·韓의 판례에 구속되지 않고, 자발적 독창적 창조성을 부린, ‘양심과 법으로 위장된 법관의 정치행위’ 말이다. 한편 판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판결을 내린다’는 합리적 이론도 있다. 이번 판결로 박근혜는 한국 최고위 공직을 상실했지만, 이 판결은 ‘판사 누군가’에게는 이익으로 돌아갈 것임을 이론은 추론하고 있다.
몇 달 동안 필자는 헌재의 예술가적 ‘판례 창조’의 용감을 부리지 말 것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한국 헌재는 ‘그런 시시한 일 안하는’ 본받아야 할 선진국보다는, 남미 삼류국가들이나 행하는 ‘멋진 탄핵’을 창조하는 얼간이 예술가가 되었다. 한국 대통령제 정부 형태의 모델인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한국의 관점에서는, 탄핵 100번 받아 마땅한 대통령이다. 국제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속여서 개전을 강행해 7년간 미군 4,400명 사망, 7,480억 달러 소요, 수천명을 평생 ’상이군인‘ 장애자로 만들고, 2008년에는 금융위기를 초래하여 미국인들을 가난하게 민든부시 미국대통령은 탄핵 발의조차 당하지 않았다. 왜?
국가적 위신 때문이다. ‘위대한 국가이기 위해서는’ “대통령”이라는 최고위 공직자의 위엄 존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스스로 못난 꼴을 보여서는. 리더국가의 자격에 흠집을 내게 된다. 그래서는 안되는 대국다운 국가적 자존심 때문이다. 미국은 프랑스는 위대한 국가, 국민이고 싶고, 그렇게 자부하며 살고 있고, 외부 세계도 그렇게 인정하고 존경해주십사는 원망願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속시원하게 단칼에’ ‘대통령 모가지’를 내리치는 일은 삼가한다. 쪼잔한 소인배 오류 국가나 대통령 목 치는 일을 즐긴다. 조용히 해결해도 되는 일을 스스로 갉아서 똥치부를 드러내며 뛰고 솟고 광란하는 사람들은 아프리카나 남미현상이다. 삼류도 못되는 오류현상이란 말이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어 모범이 되는 미국이나 프랑스 태도의 장점은 보지 못하고, 널널한 붉은 양단 옷감 걸친 한국 판관들은, 부패와 양극화 세계 1등 하는 브라질 같은 3류국 대통령 탄핵이나 모방하시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던데... 헤겔의 역사발전의 이성의 간지를 배울 일이다. 중진국의 ‘재판관이라면서’ 세계관도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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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대통령과 1000만 시민에게 ‘동백꽃 모가지 탄핵의 피와 눈물’을 생산하고 창조하신 대한민국 헌법 재판소는 왜 잔인하고도 ‘저질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었을까? (귀찮아서 아주 짧게 한마디만 언급 하겠다)
1. 지성과 세계관 부재의 판관들. 미국으로 유학 떠나시오!
한국의 담대한 판례 창조 예술가들인 헌재 재판관들. 판결문에서는 노기怒氣와 권위주의가 비친다. 와중에 정치 훈수조차 두는 점잖음(?)도 빼지 않았다. 상술했듯, 이 판결은 부당과 칼날과 노기와 권위주의이다.
이는 이 판결 구성원들의 실존적 협소함에서 초래한다. 구성원들의 협애한 사회적 교육적 환경 말이다. 북쪽 대룩의 길이 막혀, 사실상 조그만 섬나라 출신으로 옹색한데다가, 적은 자원을 두고서 아등바등 경쟁과 비교와 시기심이 난무하는 국민들, 작은 섬나라에서만 살았고, 짧은 효율적 고시 공부는 했으되, Generalist의 소양부족의 좁은 시야와, 그에 걸맞는 결핍된 지성과 부재한 세계관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좁아터진 갈라파고스 섬에서만 60여년 늙은 몸과 마음, 눈. 짧은 얇은 공부. 변론 행태에 ‘기분나쁘다고 ’8대 0으로 대못박는 재판관들의 노기등...Fachmann Idiot, 에드워드 사이드의 프로페셔날리즘이라는 단어들이 어른거린다. 이 참에 권한다, 판관들이 미국으로 유학가서 시야도 지성의 지평도 넓히기를. 인간성 도야도 필요해 보인다. 고상한 인문학인 문학·역사·철학으로 무장하라고 어느 하버드 박사 출신이 권하더라. 미물인 모기는 동족의 피를 빨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라면서. 기껏 7개월 임기 잔여에, ‘전임 다른 대통령들도 모두 다 저지른’, ‘실수’를 두고서, 거창한 헌법의 이름으로, 유독 날도끼를 내려쳐서 피를 튀겨야 하는가.
2. 권력에의 굶주림, 권력 향유의 천재일우의 기회
3월 10일 오전에 판결 후,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의 헌재가 지나치게 권력 행사를 한다’고 논평했다는 보도는 정확히 나의 견해이다. 니체가 ‘이 세상 미물인 지렁이조차도 권력을 추구한다’고, 홉스의 ‘권력 추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난다’는 말들이 설득력이 있다면, 이번 판결은 이 관점과 연관성이 있다. 한국이라는 갈라파고스의 작은 두뇌와 옹졸한 가슴 부재한 세계관의 소유자들에게는, 권력 향유의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이유 없어 보인다. 재판관들의 ‘합리적 행위자’라는 理論은 도래할 권력이 진보측이라면, 이들의 ‘의견에’ 딱 맞추어 판결을 내려야‘ 판관들의 이익이 극대화 된다고도 한다. 이번 일로 해밀턴의 ;사법기관의 가장 약한 부branch’는 얼마간 물 건너 갔다. . .
3, 압도적 뜨거운 ‘미움의 공감’의 ‘야만적’ 사회, 차분한 문명적 이성 결핍 사회
가관인 것은 못다핀 동백꽃의 절멸에, 잔인한 아우슈비츠 학살 행위에, ‘환호하며 광란하며’펄펄뛰는 한국인들의 광기였다. ‘대통령 잔혹死’를 지속시키자는 ‘넘치는 잔인한 공감’, 차거운 이성 결핍의 ‘뜨거운’ 나라의 뜨거운 정서에, 판관들이 뜨거운 공감을 느낀 것 같다. “공감empathy은 우리가 불공평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며. 사람들은 한쪽으로 쏠림 현상에 깊이 ‘공감’하다가 부당함을 저지를 수 있다, 반면 연민compassion은 “강한 친사회적 동기부여와 관련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상태”이므로, 사회는 ‘사고하는think’ 이성의 연민을 가질 것을 미국 프린스턴大 피터 싱어 고수가 권한다. 한국 대중들이사 자신도 모르게 밤낮을 줄기차게 전방위 방사하는 매체의 ‘선동’에 ‘공감당헤’ 분별력을 잃었을지라도, 재판관들이 그런다면 저급이므로. 평소 이성적 ‘연민’ 훈련이 필요해 보인다. 대통령직 참수는 촛불의 뜨거운 ‘공감’은 받겠지만, 무지막지한 팔대 빵은 이성의 우리에게서는 공감도 동의도 일으키지 못한다. 적은 자원분배를 두고서, 작아서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조그만 갈라파고스 섬에는 지성의 부재. 정서, 인격의 결여로 초래한 뜨거운 양철 지붕위의 고양이로 동동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우슈비츠 이후 나는 과연 꿈을 쓸 수 있을까’, 절망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는 지한파 日人도 있다지만, 빼도박도 못하는 토종 한국인인 나. 그래도 희망을 가질까 한다. 1000만 척의 배가 있고, 3000만의 배가 또 있으니, 사실 우리는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나는 마음으로 헌법 재판관들 8명을 파면한다. 무식하게까지 보이는, 이들의 ‘세상에 유례없는 독창적 무지막지한 판결’이 죄목이다. 그리고 추방이 아닌 특권인, 미국 유학을 권고한다. 단 몇 년간 선진 사회에서 ‘몸소’ 보고 느끼고 배우고 와야 한다. 판관으로서의 기본적 지성과 세계관의 결핍이 심하다고 판단된다.
helena 201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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